설 전날에 가서 찌짐이라도 구워 주고 올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설연휴 전에 일찌감치 시댁을 다녀와서 명절때는 늘 한가한 작은언니가 오빠네에 나물이랑 전이랑 명절음식을 좀 해다 주려고 한다기에 그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침, 설연휴 전전날에 집앞에서 넘어지셔서갑작스레 입원을해서 다리깁스와 어깨 수술을 하신 울 시어머님의 부재로 이번 설의 차례음식은 우리 며느리들끼리 지내게 된 바람에 온 신경이 시댁의 설 차례일정에 꼽혀 있었다.
우째 우째 형님하고 나하고 둘이서 ㅡ 내 남편보다는 쪼깨 더 스윗하지만, 대부분의 스윗함에는 늘 공식처럼 정비례가 되는 잔소리 폭격기를 소유하신 아주버님께서 튀김팬을 맡긴 하셨으니 엄밀하게는 셋이서 설 차례상 음식을 준비해내었다. 내남편에게는 계란물 풀기, 산적꼬치 끼우기 정도의 아이들이 하던 역할을 수행하도록(코로나덕분에 아이들은 각자 집에 두고 어른 넷이만 모여 우리지역 집합제한 조건을 지켜냈다), 요번에는 내가 잔소리 폭탄을 날려 음식들을 장만하고 설날 아침의 차례까지 무사히 마쳤다.
음복을 하고 산더미같은 접시들을 정리하고 잠시 휴식타임을 가지는 설날 오전에 캐톡~ 하고 오빠한테서 카톡이 왔다.
[엄마는 좋아하는 도가니탕, 아빠는 소머리곰탕에 소주, 식혜로 간단히 차려 봤다.] 하며 사진을 보내왔다.
오빠 혼자서 마련한 차례상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려니
큰언니가 [욕봤네~] 하며 남동생의 소꿉장난같지만 그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지는 상차림을 격려하자, 작은언니는
머그잔에 물이 넘칠 것 같은 딱 엄마 취향의 믹스커피를 쳐다보다 순간, 울컥했지만 꾹 참고 옆에서 세배돈 세고 있는 딸들에게
"외삼촌 혼자 이러고 있대. 좀 귀엽지 않냐?" 하며 싱겁게 웃으며 울컥함을 삼켰다.
어릴 적에 우리집은 제사가 매달 있었다. 족히 10번은 넘었다. 우리 가족이 6명인데 명절 차례상에는 밥그릇이 우리 가족보다 많아서 우리는 제삿밥을 그대로 하나씩 맘에 드는 것을 차지해서 음복을 하곤 했다. 어린 나는 원래 모든 집이 월례행사처럼 제사는 매달 지내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달마다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 매달 엄마가 전을 꿉는 것을 여사로 보아 오며 자라서 그런지 고등학생이 되었을 쯤에는 간단한 명태전, 육전, 고구마전, 산적꼬치, 오징어튀김 정도는 혼자 구워 낼 정도였다.
오히려 전기밥솥을 돌려 밥을 하거나 라면물 맞추는 따위의 간단한 집안일은 손도 안 대어보아서 ㅡ 정확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 손을 안 댄 것이 아니라 엄마는 나에게 집안일을 못 하도록 했다. 막내의 특권인지 귀한 딸대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시집가믄 실컷 할꺼라며 라면 물올리는 일도 우리집 4대독자인 오빠를 시켰다. 요즘 세상에는 남자가 밥을 할 줄 알아야 사랑받는다는 신식 마인드로다가 우리 남매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늘 오빠 담당이었다. ㅡ 아무튼 그런 나름 곱게 자란 나도 제사전은 척척 구워낼 정도로 우리집은 제사가 많았다.
그런 월례행사같던 제사를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듬 해부터 엄마는 싹 정리하셨다.
"이짓껏 이 많은 제사를 나름 정성껏 모시봐바도 조상덕은 커녕 잡수고 가는 줄도 나는 모르겠다. 나는 인자 며느리를 볼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며느리를 본다캐도제사는 내 손으로 없애주고 며느리를 맞아야지. 그기 맞지." 하며 엄마는 제사를 안 지내겠다고 선언을 했고 아빠도 동의했다.
"그래, 마음이 중하지, 그깟 제사상이 먼 소용이고. 다 부질없다. 인제 명절때는 아들(경상도 사투리로 아이들 이라는 뜻) 좋아하는 거나 해가지고 먹자."
그 이후로 우리는 명절때마다 친정집에 모이면 우리들의 추억의 음식인 무침회를 야채보다 오징어를 더 많이 넣어 시뻘겋게 무치고 감자를 듬뿍 넣은 매콤한 찜닭을 맛나게 해서 느끼한 명절을 마무리하곤 했다.
제사 때마다 아빠가 낮게 읇조리는 "... 신위부군..." 어쩌고 저쩌고의 멘트가 추억이 되었다.
제사없이 지내온 지 십여년이 흐르고 아빠가 떠났을 때, 엄마와 우리는 우리식으로 아빠를 추모했다. 아빠가 있는 추모공원에 명절때나 기일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아빠가 좋아하던 음식을 잔뜩 차려두고 절을 했다. 우리들만의 지방처럼 우리는 아빠 사진을 꼭 들고 갔다.
일 년에 한, 두 번이라도 잘생긴 우리 아빠 얼굴을 추억하고 싶었달까. 절을 올리고 나면 추모공원의 정자에서 아빠이야기, 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우리 4남매 대가족들의 근황이야기를 꽃피우면서 아빠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어느 해에는 추모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큰언니가 아빠가 좋아하는 문어를 금방 삶아와서 뜨끈뜨끈한 문어를 나누어 먹기도 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단팥빵은 생크림 잔득 들어간 신메뉴가 출시되면서부터는우리들의 국률처럼 ㅡ 가율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인가, 아무튼 절에 가기 전 날에는 제사상 장보는 마음으로
"내일 단팥빵하고 교촌치킨 오리지날 콤보는 내가 가지고 간데이~ 언니는 모듬회 챙겨래이~" 하며 몇몇 메뉴들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뜨끈한 문어를 썰어 먹으며 우리들만의 추모방식을 기록해둔 어느 화창한 가을 날
그리고는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였음에 기뻐하며 아빠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마치 소풍날처럼 모여서 밖에서 점심을 한끼 맛나게 나누어 먹으며 아빠를 추억했다.
이런 방법이 아빠가 가장 흡족해할 아빠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일꺼라 생각했다.
아빠는 늘 우리들 모두가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맛난 것을 잔뜩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윷놀이나 고스톱이나 한 판 할까?"할 때 가장 찐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카다가 살찐데이." 라며 세 딸들이 툴툴거리면
"너거들은 살 좀 쪄도 된다" 며 벌써로 어디가서 덩치로는 뒤쳐지지 않는 아빠의 딸들이 포동포동 살쪄가는 것을 몹시도 즐거워 하던 우리 아빠였다.
"너거 엄마처럼 통통한 기 나는 젤 예쁘기만 하드라. 애비면 보기 싫타. " 하던 아빠.
올 초부터 오미크론변이의 등장으로 온 세상에는 아예 무감각해질 정도로 확진자가 폭증하느라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추모공원에서는 설연휴 시작부터 아예 입구를 폐쇄한다는 협박 문자가 날라왔다.
아, 올해는 설날에 엄마아빠가 계신 절에도 못 다녀오려는가 심란했다. 마침 작은 언니도 지난 달부터 주중에는 서울에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가 주말에만 집으로 내려오던 중이라 다같이 움직이기도 어렵겠다싶어 더욱이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던 중에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 날인 금요일의 내 수업일정이 좀 꼬이는 바람에 4시에 중등수업만 하게 되었고 그 덕에 늘 오후 너댓 시쯤 출근하는 오빠에게 그냥 우리 둘이서만 금요일 점심때쯤 엄마아빠한테 다녀오자고 했다. 오빠도 좋다고 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서울에 있던 작은 언니, 큰언니도 금요일은 오전에 진료가 끝나니 우리도 한 두 시쯤까지는 추모공원에 도착이 가능할 거같다고 그리로 바로가서 만나자고 했다. 갑작스레 설 연휴 시작 전날에 넷이서 아빠엄마에게 다녀오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이후로 음식물 반입이 엄격히 금지된 터라 소주 한 병, 식혜 한 캔뿐이 못 챙겨 가겠지만 엄마가 떠나고 첫 새해의 첫 설날 전에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지난 달에 사진관에 맡겨 두었던 엄마아빠의 젊고 화려했던 시절의 사진액자를 챙겼다.
그렇게 갑작스러 엄마에게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못 올리고 엄마아빠 사진만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돌아서는 길이 몹시도 시리다. 오빠도 그러한 마음이었던 걸까. 닿지 않은 시린 마음을 전할 방법을 나름 명절 차례상을 차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집 4대 독자로 수십년을 오빠도 아빠와 함께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며 그 수많은 제사상을 차리고 또 절을 올리며 자랐을 터이니 이렇게 부족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가장 익숙했을 것이다.
엄마한테 다녀오던 날 밤에 내 섭섭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엄마가 꿈에 나타났다.
우리집에서 한참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가야한다며 갈 채비를 해서 현관 앞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에 급히 따라 나가서 뒤에서 엄마를 꼭 끌어안고 가지마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제 가야한다며 내 팔을 뿌리치고 저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 뒷모습에 또 엄마를 애타게 불러댔다.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을 것을 꿈에도 직감을 하고 엄마가 가는 뒷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찬찬히 꼼꼼히 온 마음을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아까는 볼 품이 없는 그냥 아무 옷이나 막입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어디선가 갑자기 윤기가 반질반질나는 고운 모피코트를 차려입고서는 사뿐사뿐 내딛는 발을 쳐다보니 반짝반짝거리는 검은 가죽구두를 곱게 차려신고 살박살박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엄청 많은 사람들이 엄마가 가는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는데, 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도 있고 힘겹게 기어가는 사람도 있고 물구나무를 서서 손으로만 걸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엄마는 사뿐사뿐 고운 길로만 잘 가고 있어서 눈물을 훔치며 그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만 보며 서 있다가 깨어났다.
나의 바람이 간절히 전해진 꿈일 뿐이겠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다고 그저 한낱 꿈따위에 내마음의 짐과 미련을 쉬이 내려 놓지는 못 할 것 같지만, 그저 마음이 시릴 때마다 엄마의 그 찬란하게 가던 뒷모습을 떠올려 바라보며 나의 응원이 닿을지 안 닿을지 모를 그 길의 끝이 평안하시기를 응원하는 수 밖에 없다.
그저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방법으로 알 수도 없는 세계에서, 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그 세계에서 엄마의 안녕을 기원하고 굳게 믿으며 오늘 하루를 감사히 겸허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당신들을 추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