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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원 Dec 03. 2023

종합세트 언니

관계: 여동생

보통 나이가 8살 정도 차이가 나면

굉장히 거리감이 든다.


한 두 살 차이가 나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데

하물며 8살 차이는 엄청나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러한 나이 차를 무색하게 하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있다.

바로 여동생이다.     


10살 차이 나는 남동생과는 데면데면 하지만

8살 차이 나는 여동생과는 영혼의 단짝이다.     


하루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날이 없다.     


시시껄렁한 가십부터 진지한 고민까지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다.   

  

나이가 드니 다양했던 친구들이 정리되고

그 자리를 여동생이 차지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나의 날것을 다 보여줄 수 없는데

가족은 또 다른 결이다.

    

어차피 내가 정제되지 않은 시절부터 함께 했기에

나의 날 것을 가장 많이 봐왔고, 또 이미 알고 있어서

따로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의 행동과 말들이 빌미가 되어

나를 공격할 일도 없다.

너무 편하다.      


그래서 요즘 친구랑 했던

모든 것들을 여동생과 한다.     



내 단짝 동생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같은 나이대가 가지는 공감대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성별로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 할머니는 옛날 사람답게

아들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부모님이 딸, 딸, 아들 순으로 아이를 낳은 것에서

아들을 낳겠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외동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할머니의 아들 타령에 엄마가 결국 굴복하셨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낳았는데 딸이었다.   

  

이왕 더 낳은 거 아들을 보자는 심산으로

쉬지 않고 셋째를 낳았고 다행히 아들이었다.

내 여동생과 남동생은 16개월 차이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바라던 아들 손주가 태어나자

품에 끼고 애지중지하며 키우셨다.  

   

아직 어린 여동생은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나의 차지였다.

     

어렸을 때는 너무 귀찮았다.

어딜 가나 동생을 데리고 가야 했고

게다나 나이 차가 많이 나니 어울려 놀 수도 없었다.     


여동생의 기저귀를 갈았던 기억,

분유를 태워서 먹였던 기억,

아기 띠를 하고 업고 다녔던 기억,

어린이집에 등·하원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렇게 여동생과는 많은 추억이 있다.   

  

내가 중학생 때까지 방을 혼자 썼는데

갑자기 혼자 자려니 너무 적적했다.  

   

여동생에게 같이 자자고 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동생은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자고 싶어 했다.

    

같이 자기 위해

용돈을 주겠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

아주 많이 회유했었다.     


하루 이틀 나의 회유에 넘어오더니

내가 고등학생 때가 되어서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은 함께 누워서 컴퓨터로

테니스 왕자를 정주행 하기도 했고,

고등학생은 매일 밤 무서운 이야기로

초등학생을 놀려 먹기도 했다.   

  

대학생은 방 청소가 하기 싫어

초등학생에게 5만 원을 주며 시키기도 했고,

늦은 밤 귀갓길이 무서운 대학생은

중학생에게 버스정류장으로 데리러 오라고도 했다.

     

집에서 먼 학교로 배정받은 고등학생이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며

맨날 학교 가기 싫다, 전학시켜 달라 울 때

대학원생은 진지하게 전학을 알아보기도 했다.

(다행히 친구가 생겨 무사히 졸업했는데

그때 처음 말 걸어준 내 동생 친구 JH에게

아주 아주 감사한 맘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임용고시 준비생은 집돌이가 되었는데

그때 아웃사이더 대학생이 수업이 없을 땐

매일 집에서 함께 했다.   

   

갓 아이를 낳은 초보 엄마가 신생아를 돌볼 때

졸업반 대학생은 일주일 중에 5일 이상을

우리 집에서 함께 육아하였다.  

    

8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우리는 그렇게 단짝이 되었다.


    

종합세트 언니


동생은 매달 연차를 나와 보낸다.

같이 맛집도 가고 쇼핑도 한다.     


일주일에 최소 1번은 우리 집으로 퇴근한다.

같이 저녁 먹고 놀다가 자고 다음 날 출근한다.     


나의 아들이

엄마 아빠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모이다.

     

나의 남편은

주말에 여행 가거나 외식할 때

여동생도 같이 갈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혈육이다.

엄마에게 단 하나 고마운 점이

여동생을 낳아줬다는 것이다.

내 동생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어떤 언니야?”

“엄마면서 언니고, 친구고, 음... 종합세트?!”     


엄마 같은 언니라니...

가슴이 먹먹했다.

    

앞글에서 썼듯

우리 엄마가 일반적이지 않기에

엄마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건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의 미약한 돌봄이

엄마의 역할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내가 동생을 돌본 것은

엄마의 돌봄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나를 엄마 같다고

생각하는 동생의 말에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내 동생은 비혼주의이다.

아직 30대 초반이니

그것이 지켜질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평생 지금처럼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삶에서

서로를 빼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비혼이든 결혼하든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때로는 엄마로, 때로는 언니로, 때로는 친구로

나는 언제나 동생의 곁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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