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청소기가 길을 잃은 이유
비움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일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원로 배우 전원주 씨의 사례는 '비움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자산가인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의 집은 수십 년간 쌓인 '절약의 흔적'들로 빈틈이 없었다. 며느리와 함께 시작한 정리 현장은 차마 다 헤아리지 못할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서
굳어버린 가루약과, 2015년에 멈춰버린 커피믹스 봉지. 심지어 10년 전 달력조차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아껴야 잘 산다’는 평생의 신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묵직한 짐들을 걷어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무려 300리터 분량의 짐을 비워내고 나서 야, 산더미 같은 물건 아래 숨어있던 식탁이 제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해진 식탁에 마주 앉아 드디어, 며느리와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던 전원주 씨. 그녀의 홀가분하고 환한 표정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것은 물건을 쌓아 두는 집착보다 사람과 눈을 맞추는 공간이 얼마나 더 큰 가치를 지니는지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최근 각광받는 로봇청소기에 얽힌 일화도 흥미롭다. 첨단 기술이 집약된 똑똑한 가전을 거실에 두고도 어르신은 여전히 청소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바닥에 물건이 너무 많으니 이 기계가 길을 못 찾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하더라. 청소기 길 터주다가 내가 먼저 지치겠어”
오늘날은 과학의 혜택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정성껏 쌓아 올린 물건 들에 치여, 소중한 마음 하나 지나갈 길조차 스스로 막아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에카르트 톨레는 “내면의 공간이 없으면 외적인 공간도 소유될 뿐, 즐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리란 단순히 쓸모를 다한 물건을 처분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나중에 쓸까?"라며 미래의 불안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지금의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마음의 여정이다.
영화 <장수상회>의 성칠 어르신을 떠올려 본다. 기억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는 매일 아침 셔츠를 빳빳하게 다리고 집안을 정갈하게 정돈한다. 그 정갈함은 단순히 깨끗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찾아올 '새로운 사랑' 혹은 '다시 찾아온 소중한 기억'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 빈자리를 마련하는 숭고한 의식이다. 비워져 있어야만 비로소 새로운 인연이 들어올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화 <인턴>의 벤 역시 마찬가지다. 70세의 나이에 최고령 인턴으로 입사한 그는 과거의 화려한 임원 경력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잘 관리된 가방 하나에 꼭 필요한 물품만 담아 출근한다. 그가 보여준 현재의 겸손함과 정돈된 일상은, 비워낸 만큼 채워지는 노년의 품격과 삶의 진정한 여유가 무엇인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웰다잉(Well-Dying), 남겨진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
웰다잉 강사로서 나는 많은 이들에게 '품격 있는 마무리'를 이야기한다. 비움은 또한 '남겨진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하다. 웰다잉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이별은 남은 가족들에게 슬픔을 넘어선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된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물건들에 얽힌 미련과 뒤엉키는 일은 유족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잘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격언처럼, 주변을 비우는 행위는 내가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관리했다는 마지막 마침표와 같다.
미니멀 라이프 5년,
나 역시 비움의 가치를 깨닫고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 지 어느덧 5년이 흘렀다. 거실을 차지하던 커다란 소파와 서가를 가득 채웠던 책들, 그리고 철마다 쌓아둔 오래된 옷가지를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손때 묻은 물건을 떠나보낼 때마다 혹여 소중한 추억까지 사라질까 망설여지기도 했고, 텅 빈 공간이 주는 낯섦에 마음이 헛헛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물건이 빠져나간 자리에 찾아온 것은 뜻밖의 깊은 평온함이었다. 그것들을 관리하는 데 소모되던 에너지가 줄어들자, 그 시간은 온전히 나 자신을 응시하는 여유로 채워졌다. 물리적인 무게를 덜어내니, 역설적으로 삶을 지탱하는 내면의 중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동안 비움의 시간은 현재를 더 밀도 있게 살아가기 위한 축복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오늘, 당신의 거실은 안녕한가요?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라고 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행복은 무언가를 더 채워 넣는 것에 있지 않고, 내 삶을 방해하는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과정에 있다.
웰다잉의 첫걸음은 반드시 무거운 유언장부터 쓰는 것만이 아니다. 바로 오늘, 나의 공간을 가볍게 덜어내는 사려 깊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비워진 작은 자리는 어느새 내 주변을 정돈해 준다는 안도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오늘 당신의 거실에서, 혹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로봇청소기의 길을 막고 있는 '너무 많은 물건'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딱 하나만 비워보길 권한다. 물건이 떠난 그 자리에는 반드시 새로운 삶의 숨결과 사람의 온기가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