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새벽을 뚫고 서울역을 향하는 발걸음이 설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행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래도 봄날 꽃구경은 제때 해야 할 것 같아 철도여행센터 상품을 이용해 조금은 급하게 꽃여행을 떠났다.
서울역에서 각자 자신들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역동성이 보기 좋았다.
아침 7시 2분 KTX에 몸을 싣고 9시 39분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KTX 요금이 좀 비싼 것만 빼고 두 시간 반 만에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오다니 정말 짱이다.
중국에서 13년 산 경험에 비추어 보면 중국은 몇 박 며 칠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한국은 1일 생활권이니 중국인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비웃을 수도 있겠다.
구례구역에서 연계된 관광버스를 타고 광양매화축제를 거쳐 오후에 지리산 노고단 자락의 화엄사로 향했다. 화엄사의 명물 홍매화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엄사 진입로부터 차들이 사람보다 더 느렸다. 중간에 내려 걸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화엄사 입구까지 이어진 청량한 계곡을 따라 걸을 수 있었기에 잘한 선택이었다. 차를 타고 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화엄사 입구를 지나 대웅전이 보이고 각황전 옆 홍매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단번에 그 홍매화인지 알 수 있었다.
홍매화는 숙종 때 화엄사 각황전 옆에 심은 삼백 살도 훌쩍 넘어선 고매(古梅)다.
지리산 능선을 넘은 아침 햇살에 그 색이 더욱 발해 붉다 못해 검붉어 흑매화라고도 한단다.
내 눈에 들어온 홍매화는 기품 있고 섹시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고 강단졌다.
그 색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그냥 예뻤다.
존재감 그 자체였다.
삼백 년이 넘는 시간, 한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가며 오늘의 고매(古梅)가 됐을 것을 생각하니 참 멋진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내 어깨가 우쭐해졌다.
매화 한 그루도 이러한데 사람이 자기의 시간을 만들어가며 자기만의 존재감을 갖는 것, 얼마나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2023.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