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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ul 05. 2022

헤어질결심

당신을 초대합니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은 스스로 이번에는 '정통 멜로'를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박쥐'가 '멜로'로서 '관객'과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었기에 필자 역시 이번에도 굉장히 불안하였다. 하지만 박찬욱은 '박쥐'의 트라우마로부터 일단 벗어난 듯 보인다.

1. 장르와 얼굴

그의 영화적 감성은 언제나 일본 영화의 거장들과 함께 했다. 소년 독본님의 힌트처럼  마스무라 야스조의 걸작 "나의 아내는 고백한다"와  요시미츠의 "소레카라",  이 두 영화를 기반으로 펼치는  그의 이번 영화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인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너무나도 인장이 뚜렷했기에 소레카라의 남자 주인공과 꽤나 흡사한 해준의 캐릭터와 마스무라 야스조의 페르소나 와키코 아야코의 15세 버전으로 보이는 탕웨이의 연기는 필자를 꽤나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박쥐보다 훨씬 나은 이유는 장르의 교배가 드디어 성공했다는 점에 있다.영화는 수사물로 시작한다.

수사물은 서스펜스를 동반한다. 하지만 서래가 나타나자 이 서스펜스는 범인을 쫓는 서스펜스의 긴장이 아닌 멜로의 감성을 품는다. 그러니깐 박찬욱은 수사물을 멜로물에 접목시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멜로물에 수사물이 아니라 수사물이 멜로를 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철저하게 살아가는 형사 앞에 그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말이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그는 늘 하던 대로 취조를 하지만 이것이 취조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사물에서 용의자에게 묻는 것과 멜로에서 타인을 알기 위해 묻는 것을 동일하게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묘한 접점. 이것은 겉으론 수사극으로 포장이 되지만  관객이 목도하는 감정은 사건의 서스펜스가 아닌 수사극- 취조 안에 숨은 멜로적 감정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취조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그녀를 범죄자로 보는 것이 아닌 소개팅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해준이 처음 그녀와 만날 때 절대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취조 속에서 그녀를 대표하는 단어들. 독립군, 사진,매 맞는 아내, 중국 여자라는 단편적 단어들로서 그녀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녀의 얼굴은 해준에 의해 겹겹이 맞춰진 퍼즐의 완성본 같은 것이다.

얼굴이 조립되고 유지가 될 때,   소년 독본님께서 지적했듯이 사실 알고 보면 해준은 범인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기에 진실을 마주칠 확률이 없었지만, 우연히 핸드폰에 저장된 기록을 보고 난 뒤  사건 현장을 재연함으로써 진실을 밝혀낸다.  대면을 통한 취조에서 벗어난 노력으로 그가 생각한 그녀의 얼굴은 다시 해체된다.  

하지만 이것이 관계의 종말일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그녀의 얼굴을 쌓아 올린 뒤 그녀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뒤돌아서 갈 때, 관객들이 마주치는 건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 너머에 있는 진실을 피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멜로 장르를 유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Key가 된다.   왜냐하면 멜로라는 장르는 관객과 연결되어 관객의 결핍을 재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핍은 자연스레 '인연이 되지 못한 애틋함'의 결핍으로서 관객의 결핍과 연결고리가 생성된다.  1막에서 '체포'가 아닌 깊은 바다에 던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통속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은 굉장히 굼뜬 상태로 1 막을 종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찬욱은 수사물을 닫고 멜로물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사건의 진실이 관계의 종말로 되지 않는 것이다.

 

2. 의식의 트릭 

"그 남자는 세 번 부딪치고 떨어졌습니다." 이 말에 해준은 정상으로 올라간다. 올라간 다음 밑을 내려다보는데 기두봉의 시선으로서 해준을 쳐다보는 쇼트가 존재한다.  이 영화는 희한하게도  죽어있는 것들로부터 바라보는 시선을 꼭 넣어준다. 이것을 단순히 '죽은 자의 시선'이자 카메라의 기교로서 받아들여도 상관은 크게 없지만 그렇다고 3번이나 나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망자가 죽기 전에 보았던 것들을 탐문하는 형사의 위치라면 죽은 자의 시선으로 관객과 해준이 마주치는 장면-(그는 자신이 손질하지 않은 시체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은 육체와 의식의 부재함을 나타내는 쇼트이다. 

이 부재의 공간은 관객의 자리가 된다. 의식은 연속적이지만 망자이기에 의식은 중단이 되어있기 때문에,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의식의 역할'을 관객에게 넘겨준다. 관객은 선택의 자유가 없이 그 시점을 통해 해준을 바라본다. 이것은 관음인 것일까? 아니면 환기를 위함일까? 

영화 스스로 제3자,  3인칭의 시선을 제공하며 시퀀스들을 나누는  분기점이 된다면,  이 시선은 남편들의 살해 현장과  이포에서의 재회에 대해 이야기를 끌어가기 전에 마치 지문처럼 시작되는 환기의 역할일 것이다. 관음이라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는 관객에게 죄를 넘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환기이냐 관음이냐가 아니라 이 시점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우리가 극의 외부인으로 극 안을 바라봄으로써 주인공들이 하는 대사가 거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있지만 영화 전체가 보여주지 않는 반쪽 자리 시선에 대해서 그것이 전부인지 아닌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결국 이 시점은 관객들을 속박하게 만들어 세 사건의 진실을  쉽사리 추론할 수 없는 위치로 바꿔 버린다.  우리의 의식은 관전은 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무기력한 '의식'으로 전락한다. 박찬욱은 관객의 의식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자연스레 1인칭의 시점에 기댈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여기에서 일종의 트릭이 발견된다. 영화는 마치 죽은 자의 시점을 통해 관객에게 전능함을 준 것 같지만 실상은 한계를 준 것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에게 객관적인 시각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건 되게 중요한 사실이다. 해준이 서래를 잠복수사할 때, 차 안에서 그의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해준이 서래와 함께 그 공간 안에 있는 장면으로 자연스레 바뀐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서래에게 말을 하고 서래 역시 자연스레 해준에게 말을 한다. 관객이 바라보는 것은 해준의 눈으로 바라본 서래의 모습이 아니라 해준의 의식에서 바라본 서래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후반부 서래가 애플워치로 녹음한 녹취록을 볼 때 더욱 여실히 드러나는데, 해준이 문자를 읽을 때 유려하게 펼쳐지는 편집의 시퀀스 이후 나타나는 해변가에서의 반대쪽 시선. 그러니깐 나머지 반쪽짜리 퍼즐은 오직 해준이 의식으로 상상한 그녀의 모습이다.  관객은 해준의 의식을 통해 영화를 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더 확대 해석하여 주장하자면 이 영화에서 플래시 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관객이 해준의 의식 안에 들어와서 그의 머릿속을 보았다면, 그러니깐 수동적인 자세만을 강요받았다면 서래는 다르다. 그동안 해준이 사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끊임없이 인공눈물을 넣고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면 그녀는  그녀는 해준의 의식 안에서 판단을 중지시키고 가정을 제거하며 본인의 경험을 기술한다. 이로써 해준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범인을 잡게 된다. 그녀가 바라보고 해제한 그의 머릿속 주도권은 오직 서래만이 독점할 뿐이다.  

3.  축약. 계층의 확장. 

서래가 말을 한다. 

"마침내 죽었어요."

"마침내...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마침내는 참 많은 의미를 동반한다. 저 대화에서 생략된 문장을 풀어쓴다면 아마 아래와 같을 것이다. 

"남편이 계속 위험한 등산길로 등반을 하였고, 제가 위험하다고 수차례 경고했었죠.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안 들었어요. 그러다 마침내 죽었어요"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이 모든 문장을 한국말로 직접 번역할 수가 없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축약.-"마침내 죽었어요"이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는 '결국'처럼 운명론적 성격이 아닌 수많은 영향으로서 결과에 도달했다는 성격을 내포한다. 이는 사과님의 비평글에서 지적하신 '닫힐 위기가 처하면, 어디선가 문이 열린다'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단어이다. 그렇기에 '마침내'는 이 영화의 성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며, 서래가 말을 했다는 점에서 마침내를 위한 의지성을 내비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침내 죽었어요."라는 문장처럼  수려한 의식의 이미지를 만드는 화려한 영화 기법들(미장센과 편집)은 놀라우나 무언가가 빠진 상태로 결말로 향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는 괄호가 된 것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의 생략을 얼굴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사의 생략은 '13개월 후'라는 지문과 얼이 빠진 해준의 표정, 얼굴을 맞고 있는 서래의 표정으로 대체된다.  1부가 해준에게만 적용된 얼굴의 조립이었다면 2부는  관객에게 두 명의 얼굴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역으로 그들의 감정을 축약,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감정의 축약과 상상, 생략은 진실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준,관객 모두에게  숨기고 있는 쪽은 서래 쪽이다. 영화는  만추의 이미지를 참고하여 탕웨이의 얼굴을 그대로 사용한다.  겉에 상처가 난 얼굴을 통해 마음을 외면화함으로써 관객에게 이미지로 추론된 서사를 구축하게끔 한다. 하지만  추론된 서사는 사건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외면화된 얼굴은 13개월뿐 아니라 사건의 퍼즐에도 맞춰질 수가 없다. 오직  마음속 '진심'과 사건의 '진실'은  '여성'의 말로서 결정된다.

그렇기에 진짜 영화가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서래 내면의 목소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자 함'이 아닌 '들려주고자 함'이다. 그 목소리는 사건의(수사물) 진실이 되며 그(멜로)에 대한 진심이 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를 붕괴시키기도 하고 그를 재우기도 한다. 그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서구 철학에서 음성언어가 로고스- 진리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는 기꺼이 그 로고스의 자격을 유지하며 영화 스스로 멜로의 필수 조건인 파토스의 위치로 간다. 그 파토스를 위해서 영화는 상당히 많은 것을 제어하는데 절대적 진리의 자격을 여성에게 주기 위해 남자들이 쉽게 말을 못 하게 사례를 들게 만들거나, 시체로 만들기도 하고, 취조 직전에 해준을 등장시키거나 스스로 목을 찌르게 만든다.   영화 스스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여 남자들을 휘발시킨다.  

이 배경에는  철저한 이분법이 내재되어 있다. 착한 남자/나쁜 남자 남자/여자 진실/거짓 불쌍한 여자/무서운 여자/ .한국 남자/중국 여자. 폭력 경찰/정중한 경찰, 랑그/빠롤 이런 이분법을 바탕으로 어느 상황으로 이끌며 그녀의 마음을 내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황을 기반으로 외면화한다.  이것은 상당히 고전적인 할리우드 멜로 구조이다.  그러니깐 박찬욱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를 기반으로 서크와 같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향해 미장센과 편집을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칙성을 하나 행하는데 그의 상황이 '의식화'된 것을 기반으로 외면화한다는 것이다. '의식화'는 '히치콕적'이다. 박찬욱은 퍼즐의 완성을 위해 3개의 레이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4. 이상한 증축 

그 퍼즐의 최종본은 그 여자의 목소리로서 산산이 붕괴가 된다. 

영화는 말씀과 사진 중에 말씀이 위에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자세는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보여왔던 음성언어와 영상언어의 실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실험이 정점에 있는 것이 '박쥐'일 텐데 눈을 제외하곤 사지가 마비된 김혜숙이 마작하러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는  '음성'사이의 조사와 음절 배치는 '영상'이 할 수 없음을 이미 펼쳐 보였다.  

하지만 이 위치까지 올라가는데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첫 번째로 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서래가 고양이에게 말한다.

"去把他的心拿来给我" (대만 예고편 참고) 

이 말을 구글에  번역하자면 이렇게 된다. "그의 마음을 가지고 오라"

검댕님의 지적처럼 통상적으로 '心'은 마음으로  '他'는 '그'로 자동 의역이 된다.

 그것은 파파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心'은'이 '심장'으로  지칭 대명사인 '他'는 '그'가 아닌 '친절한 형사'라는 이상한 번역이 들어간다.(영어 자막도 마찬가지다.)  

그 번역은 완벽한 대사가 되어 해준에게 소리로서 들린다. 영화는 서래의 대사로 해준이 오해하게 만들고, 나중에 그 오해를 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번역을 실제 말인 것처럼 밀고 나간 것이다.  소리에서 이상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부산임에도 불구하고 부산 사투리가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김신영이 경북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면, 경남- 부산 사투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박찬욱은 사투리로서 발생되는 현장성보다 표준말로서 발생되는 의사소통의 원활함에 좀 더 방점을 둔 것이다.  

이상함은 소리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깐 실제가 되었을 때 곤란하게 되는 결정적 지점들을 영화는 제외한다. 대표적인 것이 아들일 것이다. 아들이 나오는 순간 관객에게는 멜로의 감정보다 실제 '이혼'의 복잡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철성의 어머니이다. 어차피 얼마 못 살 존재라고 치부하고 보여주지도 않음으로써 살인과 잔인성, 윤리성으로부터 관객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강제로 소거된 두 설정들은 마지막 '이포'를 통해 더 교묘해진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포라는 곳에 원전이라는 대한민국의 복잡한 정치적 산업체를 넣어두곤 그곳의 에너지- 설정들을 사용하며  해준을 서래의 대타자- 국가로서 관념의 역할을 부여시키고 싶어 한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박찬욱은 영화적으로 살인과 폭력, 자살, 무능, 의역들이 허용되는 세계를 따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이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는 오직 현실을 배반하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소거의 본심은 그의 세계를 따라온 자에게는 한편으론 꾸준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순하게 보인다. 그곳에는 주인공이 되었건, 감독이 되었건, 내가 한 행위의  '책임의식'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국적성'의 이유가 드러난다. 책임의식이 없는  순전한 영화의 세계.  그리고 이 세계는 철저하게 '이상함'을 눈치 못 채는 '관객의 무지성'을 믿음으로서 생기는 세계이다. 미장센과 편집은 눈이 부시지만, 결국에 뭔가 속았다는 느낌 혹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찬욱은 늘 해 오던 대로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배치한 체 수많은 것들을 비윤리적으로 제거하면서 감정의 격랑으로서 관객을 초대한 것이다.  이것이 '시네마'라면 '시네마'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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