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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ul 03. 2022

박쥐

전 억울해요. 

박찬욱.  필자가 기억하는 바로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자기 멋대로 영화를 찍어버린 복수는 나의 것부터 시작하여,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차례로 칸, 베니스, 베를린의 초이스를 받아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신예로 올라간 다음  힘을 주고 찍은 작품이 박쥐였다. 올드보이 이후에 두 번째로 칸에 초청받은 작품도 이 작품이었고,  칸이 관리하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준 것도 이 작품이었다. (물론 그때 심사위원으로 이창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겠다.) 박쥐는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는데, 박찬욱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눈치였다. 오직 이동진만이 열렬히 그를 지지하였다. 만약 지금의 이동진의 권력이었다면 평이 뒤집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재개봉 이후 속속 박쥐에 대한 젊은 영화광들의 열렬한 찬사가 나오는 걸 보니 필자도 이제 뒤안길로 가야 할 세대임을 직감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다시 찾아본 이유는 헤어질 결심이 유난히 박쥐로부터 탄생한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뒷배경을 뒤로하고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의 느낌은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역시나 이 작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박찬욱을 이야기할 때, 김기영의 적자 또는 무국적성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어쩔 수가 없다. 그의 감성은 일본 B급 영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가 그 바탕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데 영화의 방향은 철저하게 A급을 향해 나가있다. 좀 자세히 말하자면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마스무라 야스오의 색깔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복수 3부작이 성공이 될 수 있었던 근원은 그가 동경했던 위대한 일본의 거장들로부터 끊임없이 힌트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미장센이나 편집을 통해 단순히 영화가 세련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A급 영화-히치콕이나 나루세 미키오, 구로사와 같이 정제된 것처럼 보이게 영화를 변형해 나간다.  방향으로 이끄는 힘은 철저하게 영화적 쾌락이며 도착지는 신화이다. 물론 B급 감성이 미장센과 편집이라는 가장 영화적인 기본 문법으로서 A급이 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에 이는 예정이 되어 있는 실패극이다. 이 실패는 복수의 한계, 신화의 비극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 작전으로 그의 3부작은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하였다. 

그렇기에 박쥐는 그에게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을 계속 사용할 수 없으니깐, 그렇기에 박쥐는 모두가 걱정을 하였고,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걸. 박찬욱은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A급의 영화의 위치에 어떠한 거장의 세계도 아닌 자신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배치하였다. 문제는 박찬욱의 세계는 스즈키 세이준의 적나라한 영향을 받은 3인조로부터 공동경비구역의 외부인의 시선까지 하나같이 무국적자였다는 것에 있다. 관객과 국내 비평가들은 한국에 사는데 그의 무국적, 외부인의 시선으로 인해 박쥐의 세계는 '날것'이 아니라 완전히 가공되고 포장되고 생산된 '박찬욱의 월드'가 되어 버렸다.  마작을 하고 보드카를 마시며 옛날 가요를 LP로 듣는, 현실과 괴리가 있는 기괴한 세상에서 한국인으로서 마음 한 곳 둘 곳이 사라져 버린다.  물론 박찬욱은 이게 왜 한국적이지 않냐고, 무국적이 잘못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철저하게 90년대 싸구려 B급 비디오의 감성으로서 만들어진 영화들 - 예를 들어  로저 코먼,스튜어트 고든 같은 영화들처럼 한국인이 모르는 외국문화를 영상으로 접하였다면, ' 원래 그런가 보다'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렸을 것이다.하지만 필자는 한국 사람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한국인인데 한국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세계를 감독과 배우들은  '신화적' 공간으로 표현한다. 촬영, 제작비로 인해 자연스레 갖춰야 할 쌈마이 정신이라는 B급의 전통이라기 보다 A급으로 구성되었으나 B급처럼 보이기 위해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이 영화는 A급에서 B급으로 떨어져야 한다. 이 추락의 방향은 박쥐의 주인공의 추락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니깐 그는 복수 3부작의 기존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서 작품을 내놓은 셈인 것이다.  문제는 A급의 세계가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세계임과 동시에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B급 영화로, 한국인은 외부인의 시선으로서 B급으로 봐야 하는 영화가 된 셈이다.  이는 자국민으로서는 상당한 모욕이다. 

(필자는 아직도 2006년 파리에 갔을 때, 한국 남자들은 왜 여자들을 때리고 못살게 구냐고 질문했던 김기덕 팬을 자처한 파리지앵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박찬욱이 여기에 사과할 마음이 있을까? 천만에.

박쥐에서 설정된 김혜숙의 무기력한 신체는 관객을 향한  냉소이다. 관객은 그들의 살인을 보았고, 같이 목격하였다. 증언을 해줄 증인으로서의 위치- 즉 관객은  김혜숙이 가져간다. ( 이것은 굉장히 히치콕적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보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서  '보는 것'에 대한 소외는  박인환의 캐릭터로서 구체화가 된다. 그는 결국 진리가 보는 것임을 몸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이를 철학적 접근으로 봐도 상관은 없지만,  영화와 관객의 관계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비유하는 죽음이며, 동굴까지 소환할 필요는 없고 영화를  관람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조롱이다. (그가 얼마나 극단적인 극장론자인지가 드러난다.)

챕터 2에서 박인환이 김혜숙으로 변경이 되는 것은 관객을 속아내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이 모든 것 파멸들은 '보다'가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욕망의 갈망과 상처를 가리지 않고 보여준다.  시각은 청각을 압도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청각은 뱀파이어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보여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약속된 문자를 가르키거나, 수신호를 하면 된다.  더욱이 소리에 민감한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김옥빈이 필리핀 여자의 생사를 알지도 못하였을 때,  시각의 한계를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깐 그들이 파멸하는 이유는 '보다'의 영역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볼 수는 있긴 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파멸하는 모습- 햇빛에 날아가는 모습 또한 김혜숙의 시선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징벌적 햇빛이 아닌 운명의 끝에서 이들이 느끼는 애처로움을  영화는 드러낸 것이다. 이 영화에 '관객'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이 영화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박찬욱 말로 순전히 멜로물이라고 했을 때, 멜로는 관객과 연결되어 관객들이 겪는 결점들을 구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국 관객의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으며, 뱀파이어라는 장르 영화와 교배함으로써 관객의 위치에 뱀파이어를 올려놓고 있다.  결국 그들의 파멸은 멜로적 과잉이 아닌 셈이며,  관객이 공감할 어떠한 현실감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 안에 초대도 받지 못한 관객에게 영화는 수많은 기호들을 뿌려놓는다. 이러한 기호들은 멜로의 양식과 무관하다.  더욱이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기호들 - 교양이 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마그리트나 기독교, 철학 등등은 멜로 영화적 성취라기 보다, 이 기괴하게 교배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저급한 것을 본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기호들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기호만 던질 뿐 어떠한 조립도 하지 않으니깐 말이다. 더 나아가, b급 영화를 지향한다는 이유만으로 은근슬쩍 몇 가지 설정의 오류들을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실패할 것이고, 실패해야 하니깐. 이 영화는 결과물보다도 추락하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이고, 추락하는 자에 연민을, 추락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을 증오하는 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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