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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Aug 21. 2022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모른다 


서문


2014년에 개봉을 하였으니 이 영화를 관람한지 8년이 되었다. 필자가 이런 고백을 먼저 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선택을 필자가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칸의 선택이 ‘인사이드 르윈’이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물었고, 다른 사람들은 레즈비언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가장 도발적이며 강렬한 영화라고 칭찬하였다. 이런 여론 때문인지, 씨네 21에서는 이 영화에 관련된 비평글로 한창호 비평가의 글만 기재가 되었다. 그 당시 필자가 들어갔던 상영관에서는 베드신이 나올 때 당혹해하는 커플들의 수근덕거림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물론 필자도 이 영화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 레즈비언이나 게이를 다룰 때 어떠한 투쟁이나 혹은 편견으로 몰리는 ‘억울함’이 있어야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13년 칸을 뒤흔든 이 영화는 그 당시의 나에겐 그저 이상한 영화로서 남았었다. 하지만 8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의 궁금증, 그리고 이 영화를 안본 다른 관객들이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가 너무 궁금하였다.


관객-음악과 운명


멜로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melo’(곡)와 ‘drama’(극)가 합쳐진 것이다. 멜로는 음악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위대한 멜로 영화들은 항상 ‘음악’을 강제적으로 삽입함으로써 감정선을 강조하거나 유지한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안개’를 추천하고 해준은 그 노래를 핸드폰으로 듣는다. 둘이 떨어져 있어도 그 노래를 해준이 들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듣는 것인지 쉽게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음악은 기존의 영화와 조금 다르게 사용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도 한 아델과 엠마의 첫 만남 시퀀스를 자세히 보자. 




영화는 아델이 집을 떠날 때부터 타악기의 음색으로 먼저 관객의 귓가를 두드리고,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할 즈음 근처 골목에서 그 리듬으로 연주하고 있는 악기 연주자를 슬쩍 보여주며 '영화음악'이 아닌 '연주하는 음악'처럼 둔갑시킨다. 이것은 분명히 ‘연출’이다. 하지만 그녀가 음악의 진원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타악기의 오묘한 음색은 관객의 마음과 아델의 마음을 같이 요동치게 만든다. 이것은 순전히 ‘모른다’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관객에게 먼저 들리던 음원의 진원지와 아델이 귓가를 흔드는 진원지가 스크린 안에 존재할 때 ‘보이지 않던 음악의 연주’는 단순히 아델을 위한 ‘의도된 연출’이 아니라 아델 뿐 아니라 관객 눈앞에 벌어지는 ‘실제 상황’으로 변경하게 만든 것이다.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에 아델은 길 건너에 있는 파란 머리의 엠마를 본다. 강렬한, 당혹스러운 시선. 아델 스스로 생각했을 때 문학 시간에 넌지시 내비쳤던 ‘첫눈에 반한 이성’에 대한 토론이 그저 ‘토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앞날을 예측하게 만드는 전조’처럼 떠오를 수밖에 없는 강렬함이 길 건너에 있다.

이미 발현된 예언, 그리고 만남. 영화는 ‘파란 머리’로서 자연광 속에 사실상 조명과도 같은 효과를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엠마. 실생활 속 공공장소가 아델과 엠마를 위한 운명적인 장소로 변경된다. 감독은 이 ‘운명적 만남’에 대담한 시점 쇼트를 시도한다. 바로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은 분명히 아델의 시점으로 길 건너의 엠마를 보고 있었지만,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델의 시점과 아델의 눈빛 사이에 제3자의 시선이 숨어있다. 둘이 지나가며 눈을 마주칠 때 그 순간을 제3자의 시점으로 포착시킴으로써 ‘강렬함’을 아델을 통해서가 아닌 관객에게 직접 전달한다.


영화는 이들의 감정이 누군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직접 전달되길 원하는 셈이다.



엠마-음식과 실존주의


유럽에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로네제 파스타는 사실 되게 흔한 요리이다. 하지만 굴은 다르다. 유럽 내에서 굴은 엄청 비싼 요리이다. 우리나라처럼 마트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매가 가능하여 김장할 때 그냥 겉절이로 사용하는 그런 식재료가 아니다. 아델의 집에서는 계속 볼로네제 파스타를 내놓지만 엠마의 집에서는 굴을 거의 매번 사온다는 말로서 은연중에 ‘자본’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 자본의 차이는 계급의 차이를 만든다. 계급적인 차이는 음식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에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엠마의 부모님은 아델이 왜 선생님을 선택하는지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고, 아델의 부모님은 엠마가 굶어죽지 않을까 걱정한다.


자본의 계급적인 차이는 두 부모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차이를 발생시킨 것이다. 이들 부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과 미술을 통해 사고의 우위를 가지고 가는 것은 엠마이기에 이와 관련된 아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은 스쳐 지나가듯 나온다. 여기에 방점을 찍는 것이 있는데 영화는 엠마의 입을 통해 책을 소개한다. 바로‘장 폴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다. 엠마는 책의 뒷배경은[1] 생략한 상태에서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실존주의를 깔끔하게 설명을 한 다음 샤르트르의 주장이 전 세대를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곤 아델을 그린 크로키를 건넨다. 엠마의 작품을 본 아델은 ‘이것은 나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대답에 엠마는 ‘수정해야 해’라고 에둘러 이야기하지만 ‘크로키’는 빠르게 표현하는 스케치 기법이지 수정을 요하는 기법이 아니다. 엠마는 그녀의 방식대로 아델을 자신의 작품에 모델로 쓸 뿐이다.



이런 그녀에 대한 판단은 철저하게 관객에게 엠마를 선택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첫 번째로 엠마가 믿고 있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상을 아델과 그녀의 관계로 축소시키자면, 엠마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실존에 반한 것일까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여기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그녀의 실존은 사랑의 감정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엠마의 표정에서 아델에 대한 실망감을 엿볼 수 있다. 아델은 엠마가 보는 시선으로만 존재할 뿐 그녀를 탐구하지도, 그녀의 본질을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엠마가 놓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한번 상속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개인의 선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때 실존주의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의 고민. 하지만 엠마는 여기에 대해서 고민이 없어 보인다. 


계급과 예술은 샤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통해 강조한 ‘실천과 참여’, 개인의 주체성과 상호 주체성을 배반하고 있는 셈이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화는 이 둘의 만남을 강렬하게 표현했지만 이들이 사귀고 헤어지는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이들의 관계 속 본질에 다가간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아델의 시선을 통해 엠마의 단면을 목격하고, 관계의 단면을 목격할 뿐이다.



누가 외로운 것인가?


운명적인 만남에서 관객의 자리를, 샤르트르와 미술의 영역에서 엠마의 존재를 추론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사랑의 당사자인 아델의 존재는 어디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먼저 이 영화의 제목이자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 ‘파랑’의 이미지로 보자. 엠마를 처음 만났을 때, 엠마의 머리가 파란색이었고 그녀를 만날수록 아델의 주변 색이 파란색이 되어간다는 걸 상기해 보다면 ‘파랑’은 엠마에게 영향을 받은 색이며 아델의 색이 되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그저 아델의 시선으로 본 단면이거니와 아델이 파래질수록 엠마는 다른 색깔로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볼 때 그녀들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색깔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를 곰곰이 복기한다면 이 영화의 의외성이 보이는데, 이 영화는 아델과 엠마의 뜨거운 사랑만큼 아델의 주변의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을 고려한다면 그 ‘파란색’이 온전히 엠마로 인한 것인지, 엠마가 변하는 색이 온전히 아델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주변 환경에서 그녀를 감싸고 있는 정치, 젠더, 계급 등의 문제에 그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지키는 것은 오직 ‘선생님’이라는 직업이다. 그러니깐 마지막에 아델이 보여주는 파란색은 오직 엠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로 인해 본인 스스로가 표현하는 색깔인 것이다. 영화는 사회의 여러 가지 이슈들의 색깔들을 개인적으로 축소하며 ‘파랑’이라는 색깔로 단순화시킨다. 이 단순화와 개인화는 LGBT의 로맨스물이라기 보다 소녀의 보편적 성장담으로 종결된다.




결국엔 이 평범한 성장담을 비범하게 포장했던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끊임없이 그녀의 입을 카메라 앵글 중앙에 가져다 놓는다. 입뿐인가? 영화가 처음 오프닝- 아델이 문을 열고 나올 때부터 교내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대화를 할 때까지 영화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열고자 하는 열망을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그녀의 입뿐만이 아니라 문이기도 하고, 친구 간의 관계이기도 하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입을 통해 밖으로 뱉어내게 하는 토론 수업이기도 하다. 영화는 닫혀 있는 모든 것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자꾸 여는 것에 집착을 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 대답에 따라 영화를 보는 결이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가장 먼저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과 신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충족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할 텐데, 그녀 스스로 ‘식탐’을 주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듯 그녀의 속은 무엇도 채울 수가 없어 보인다. 공허함. 항상 열려 있는 입은 어떤 것도 닫게 할 수 없다. 영화는 그녀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행위에 주목한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것에 끊임없이 주목하는 것처럼 섹스에도 마찬가지로 시선이 떨어지지 않을 때 영화가 정말 공허감을 채우는 행위에 주목하는 건지 공허함을 정말 메꾸고 싶은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한두 번 나올 베드신이 눈앞에서 5분 넘게 재현이 될 때, 카메라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베드신에서 그들의 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섹스를 감독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느냐를 생각하게 만든다. 양가적인 효과를 만들 수가 있는데 하나는 영화의 표현의 자유이다. 그때까지 LGBT 영화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으니 그 대담성에서 찬사를 받을 수가 있다. 또한 이것이 몇 분이고 지속되며 몇 번이고 반복이 된다면 이들의 행위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섹스를 에로틱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같은 당연한 행위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한때 카메라가 남근으로서 묘사되고 끊임없이 비판받았던 지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음경과 성기, 입이라는 신체 부위를 애무하는 장면을 놓치려고 하지 않을 때, 아델이 성기가 없는 것을 떠올린다면 아델의 섹스하는 행위를 놓치지 않는 카메라는 사실상 이들의 섹스에 반응하는 발기된 성기가 된다. 


그래서 카메라는 모든 닫혀있는 것에 혐오의 감정을 내비친다. 이런 카메라의 욕망은 피사체를 담고 싶은 욕망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남근성을 일부러 강조하여 아델의 육체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들 그녀의 구멍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만 되새길 뿐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본질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본질은 케시시는 '육체'라고 가정하지만 아델은 자신의 본질을 계속 바꾼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계속 관계의 본질, 아델의 본질을 쉬이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나타난다.  




그녀의 본질은 커녕 실존조차 쉬이 알 수 없다는 자기 고백은 엔딩에서 아델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장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멜로나 아델의 성장담이기 보다 남근성을 강조하여 스스로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카메라의 본질에 대한 무용론이자 외로운 외침인 셈이다. 


[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펼친 실존주의가 전후 프랑스를 뒤흔들었고 이로 인해 샤르트르는 카톨릭, 유물론자들로부터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때 출간한 책이 바로 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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