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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ar 05. 2022

더 배트맨

박쥐는 원래 더럽다. 

더 배트맨 첫 장면- 시장 후보를 향한  도촬 시퀀스와 캣우먼을 향한 도촬 시퀀스에서 관객이 다른 느낌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대사'가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로 나뉜다. 대사가 없이 그저 도촬하는 시퀀스에서 관객은 이것이 '정의'를 위한 시선인지 '범죄'를 위한 시선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 헷갈리는 상황에서 범죄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지'이다.  리들러가 본 이미지인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는 '행복'을 도촬하고 있다는 관객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도촬을 하다가 영화는 시장 후보가 통화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가 통화를 할 때 어둠 속에 리들러가 숨어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어떻게 이곳까지 편안하게 들어왔을까? 리들러가 시장 후보 집에 너무나도 가볍게 진입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는 배트맨도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건물이라는 벽을 쉽게 통과하며, 그 건물 안은 항상 '진실'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히 여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은 욕망이 있을 텐데 그들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이는 배트맨이 특히 더 그러는데 그는 아예 대놓고 문에 노크를 한다. 영화는 이 이유를 리들러의 대사를 통해 설명한다. " 가면 쓴 것 자체가 나"라고.  결국 내가 괴물이 되었을 때,  숨기지 않고 건물이라는 벽을 통과할 때 마주치는 것이 진실이자 내부의 괴물들을 마주치는 것이다. 



하지만 리들러와 배트맨의 차이는 정확히 서사가 90분을 넘어갈 때 드러난다. 배트맨이 아닌 웨인으로서 클럽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인데 이때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다. '매'와 '박쥐'가 도시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닌 웨인과 팔코네가 비밀을 전달하는 것이다. 즉 진실은 '웨인'이 알아야 할 진실과 '박쥐'가 알아야 할 진실이 파편화되어있는 셈이다. 하지만 리들러는 이 두 가지 진실이 하나의 결과물로 나왔다고 조롱한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와 어떻게 이 진실을 마주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리들러가 선택하는 것은 '텍스트'이다. 얼굴이라는 것을 '재개발'의 콘크리트처럼 회색 테이프로 쌓아올린 다음 그곳에 '텍스트'로서 수수께끼를 남긴다.

이를 단순히 '텍스트'를 '힌트'라고 이해하면 이 영화가 편하지만  유독 리들러가 관음에 '사운드'를 동원할 줄 몰랐고, 배트맨은 가능했다는 사실이 걸린다. 이것은 분명히도 '목적'의 차이보다 '기술'과 '자본'의 차이이다. '관음'이 영화를 보는 행위라는 히치콕식으로 규정짓는다면 이는 자연스레 무성영화가 인식하는 세계와 유성영화가 인식하는 세계의 대결처럼 보인다.  두 방식은 극명하게 다른데 하나는 영상과 문자가 순차적으로 나온다는 것이고, 유성은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리들러가 배트맨이 찾아야 하는 진실을 '영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남긴 텍스트는 '자막'인 셈이다. 배트맨은 자막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고 여기에 맞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 

흐름을 없이 존재하는 단편적인 "자막"은 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면 "수수께끼"가 되지만 유성영화는 이 '자막'을 '텍스트'로 오독한다. 이는"유 알 엘"이라는 문자가  스페인어가 아닌 URL이었음을 말로서 깨달았을 때 드러나게 된다.  자막이 필요 없는 유성영화가 무성영화를 이해하였을 때, 무성영화(심지어 리들러는 입을 막고 있다)는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최신 매체의 방식으로 변질한다. 

어쩌면 여기에서 이미 게임은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의미가 분절된 틱톡이나 인스타의 short 같은 영상은 의미를 다지는 것엔 효과적이지만 랜덤 혹은 폐쇄적이기 때문에 라이크는 받을지언정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핸드폰을 다들 들고 다니지 않으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세팅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영화는 배트맨에게 힘을 제공한다. 물론 배트맨은 유성영화에도 필요하지만 무성영화에도 필요한 "빛"을 제공함으로써 리들러를 막는데 실패하지만  아버지의 신화가 할리우드의 신화라는 것을 놓지 않는다.  여태까지 살아온 할리우드를 변질된 Short은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그리고 할리우드 식대로 이를 처단하고 자신의 "빛"으로 영사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담의 관객들은 당연하게도 배트맨의 빛에 따라 구출된다. 


그렇기에 아무리 비가 내린다고 할지라도 이 영화가 어두운 이유, 그들이 코스튬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 자신들을 씻길 거부한다. 영화도 그들을 씻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물들의 얼굴을 손대지 않는다. 입과 귀, 눈이라는 영화를 지각하는 요소가 담긴 얼굴의 파괴는 결국 영화의 파괴니깐. 

P.S

개인적으로 이 멍청한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펭귄이 팔코네의 공간에서 고담시티를 내려다보는 장면이었다.  펭귄은 팔코네가 사라진 영상실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신의 영사기를 고담에 돌리는 장면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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