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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ar 20. 2022

파워 오브 도그 -의지

파워 오브 도그 


비범함

“아빠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가 행복하길 바랬다.엄마를 돕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지”

한 아이의 독백으로 시작한 영화는 “I”를 보여준다. 이것이 “I”인 건지, 로마자 1인 건지는 알 수가 없다. ‘1925년 몬타나’라는 정확한 지명과 이름으로서 영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제일 먼저 담는 것은 ‘소’와 ‘소’를 모는 ‘카우보이’들이 나온다. 그 뒤 카메라는 시점을 집안으로 옮긴다. 집 안과 집 밖 ‘창’은 명암 대비가 확실하다. 안에는 어둠이 있다면, 밖은 ‘빛’이 있다. 그리고 창을 통해 한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나오고, 카메라는 그를 쫓아서 움직인다. 남자의 동선을 따라잡기 위해 창과 창 사이를 이동하며 카메라가 움직일 때마다 필름에 현상된 이미지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집은 그를 온전히 담아내는 카메라인가?’ 

의구심이 들 때 즈음 그를 밖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단순히 ‘환기’라고 볼 수가 없는 쇼트이다. 바로 다음에 붙어있는 장면은 그가 문소리와 함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서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안과 밖의 시점 변화를 통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가 문을 여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 찍었을까? 


눈물

조지가 로즈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나들이를 떠나는 시퀀스는 필이 보여준 목장의 풍경과 달리 그곳에 ‘소’나 ‘개’가 존재하지 않는 풍경들이다. 로즈의 부탁으로 멈춘 곳에서 조지는 로즈에게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그 말에 신난 로즈는 조지에게 춤을 가르쳐준다. 로즈의 리듬에 따라추는 조지는 순간적으로 울컥하게 되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한 그녀의 안부말에 그는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라고 고백한다. 필이 자신의 부하들 앞에 나눈 건배사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와도 같은 끈끈한 형제애,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이며 자기를 보러 오는 부모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까지 이런 말을 내뱉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다른 인물인 로즈의 나약함을 통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로즈가 처음 울었던 곳은 로즈의 가게였다. 그곳에서의 울음은 필의 너무나도 무례한 태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레드밀에서 다른 손님을 받을 때도 신경쇠약 직전의 상황처럼 행동한다. 이 행동들은 결혼 후 조지의 집에 온 뒤에 더해져 가고, 자연스레 그녀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대성통곡을 하고 기절하는 순간은 ‘필’과 아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인디언들이 만든 장갑을 보았을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가진 불안한 행동들을 단순히 ‘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녀가 도움이 필요할 때 몸소 문을 열고 나가 대신 서빙했던 조지조차 그녀를 위해 문을 열지 않고, 아들 또한 필요한 순간마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조지와 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심신을 안정하기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먼저 손 이야기를 해보자. 레드밀에서 조지가 다시 로즈의 가게로 찾아왔을 때, 그곳은 자동 피아노로 인해서 연주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직 연주하는 연기만 할 뿐이다. 이와 다르게 필이 사는 집에서는 모든 것이 수동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연주하고, 편지를 쓰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손’은 수동과 자동을 나누기도 하며 그 시대의 분위기를 나눈다. ‘서부의 역사’가 끝나가는 시대.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1925년은 대공황 시대이다. 여기에서 손을 자주 사용하며, 고전문학을 전공한 ‘필’은 단순히 남성성을 상징한다기 보다 사라져가는 구시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로즈’가필의 집에서 연주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로즈가 피아노를 연습할 때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단 그녀가 악보를 고치려고 할 때, 문이 열린다. 그녀의 시점은 자연스레 문을 향하지만 아무도 없다. 이상한 기운을 느끼지만 그녀는 연주를 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동안 그녀의 연주에 다른 소리가 겹친다. 그 소리는 ‘필’이 연주하는 소리이다. 필은 그녀에게 복수하듯 계단 위 방에서 발로서 문을 열고 그녀의 연습을 방해하고 조롱한다. 필의 화려한 연주 실력을 ‘필의 손’을 통해 보여준다. 즉 두 사람에게 ‘손’은 ‘악수’와 같은 관계의 정립이나 ‘문’을 열면서 볼 수 있는 세계를 향한 확장이 아닌 셈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문을 여는 장면을 소거함으로써 ‘손’이 가진 긍정성을 제거한다. 이 긍정성의 제거는 필과 로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터의 토끼 해부 장면과 피터가 소의 가죽을 벗기는 장면에서 오직 ‘손’은 ‘포획’과 ‘죽음’ ,’해부’로서 그 의미를 다한다. 피터조차 생화는 존재하지 않고 조화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손에는 생명이 없다. 


사라짐.

‘손’의 악독한 표현 방식만큼이나 기괴한 것은 바로 인물들이 프레임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집 밖, 도시의 상품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조지의 동선과 함께한다. 이와 달리 필의 동선은 야생을 향한다.

그리고 야생과 도시 사이를 오가는 유일한 사람은 피터이다. 이 차이는 셋이 종착하는 곳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 셋이 모두 목장의 안과 밖을 자연스레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인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로즈는 그러지 못하며 남자들의 이동들 또한 막지 못한다. 되려 남편 조지에게 피터를 데려가는 필을 말려보라고 말하지만 조지는 걱정하지 말라며 다그치기 바쁘다. 이동의 제약은 프레임의 제약으로 확장된다. 그녀가 집에 있을 때마다 ‘필’이나 ‘하인’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시부모나 주지사 또는 토끼를 사냥하러 간 피터,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조지는 자연스레 프레임에서 사라진다.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해방이라고 표현한다면 이들은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셈이다. 결국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프레임에서 사라지지 못하는 로즈와 사냥하러 나가는 사냥꾼처럼 프레임에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남자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는 셈이다. 여기에서부터 이 영화의 도발성이 빛을 발휘한다. 프레임 안에서 있어야 하는 주인공들을 과감하게 삭제함으로써, 관객이 그것을 유추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유추는 정확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말이다. 왜냐하면 온전히 연결되어야 하는 쇼트와 쇼트가 ‘손’의 공백으로 인해 분절되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관객의 시선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손’의 장면들이 사라지고, 없어도 되는 ‘손’의 장면들 - 시체를 다루는 손과, 피에 범벅된 손,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손, 사진을 발견한 손이 그 사이를 메꾼다. 시선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그들이 해방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공포, 거세, 단절, 복수, 살인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단어들이다. 즉 ‘사라짐’은 정확한 독해를 사라지게 만들고, 남자들의 해방을 절하시킨다. 


손, 사라짐의 정점은 집이다. 다시 오프닝을 상기해 보자. 영화에서 처음 필이 집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 영화는 그가 문을 여는 손을 보여주지 않았다. 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레임 밖의 세계와 프레임 안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행위이자 의지이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문을 여는 장면이 쉬이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안과 밖이라는 두 세계가 정말 구분이 되어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집과 목장, 로즈가 있던 레드밀과 버즈의 무덤 등 말이다. 문을 여는 행위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애초에 그곳에 안과 밖,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구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브롱코 헨리의 유산이 있는진 곳과 자궁과도 같은 나무뿌리, 소의 가죽을 잘라내는 곳까지 모든 곳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이 되어 있는 셈이다. 결국 손의 무용성은 로즈가 인디언 장갑을 끼고 울 때 극명하게 눈물로서 표현한다.  그녀는 남성들의 신화가 구전처럼 존재하는 땅에 있는 한 탈출이 불가능하고 치유가 될 수 없다. 즉 프레임에서 남성들의 사라진 이유는 ‘집과 시선에서 해방, 외유’가 아닌 오직 ‘집의 영역의 범위’가 되며, 그 범위에서 그들이 얻어오는 것은 탄저균과 같은 죽음과 피뿐이다. 이 과감한 프레임 삭제와 사라짐을 통해 감독은 풍경의 ‘낭만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다른 이미지로 종결한다. 

그 풍경은 몬타나, 목장의 풍경이자 관객들의 머릿속에 있는 ‘서부극’의 풍경이다. 영화는 브롱코 헨리의 신화를 ‘구두’로서 들려준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아닌 ‘구전’라는 사실이다. 이 ‘구전’은 유산이나 상징들이 곁들어지며 ‘신화 혹은 전설’로 발전한다. 이 신화성은 브롱코 헨리에게 직접 전수받았다고 하는 필의 마초적인 행동을 통해서 더 확고해지며, 이와 동시에 관객의 머릿속에는 서부극 속 마초남의 이미지로 공고해진다. 영화는 브롱코헨리에게 전수받은 필의 마초성이 나체로서 성적 이미지로 더욱 강렬하게 드러날 때,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며 박살 낸다. 이 이미지는 동성애를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사진들인데 이는 사실상 조작 증거에 가깝다. 그 이유는 꽤나 명확하다. 필의 과거의 치유가 핵심이 아니라 필을 향한 이미지 변환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서 이들을 바라보게끔 만든다. 

중요한 건 ‘브롱코 헨리’의 집이 존재하는 한 로즈는 파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영화는 살부를 예고한다. 오프닝에선 무슨 수가 있어도 마초를 담아내겠다는 카메라의 이동이 존재한다면, 후반부에서는 대를 끊어서라도 기어이 집 해체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존재한다. 지금 제인 캠피온은 파워오브도그를 통해  ‘서부’자체에 분노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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