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ny May 23. 2022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의성마 영화 


만남 


부산국제영화제를 당일치기로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하기로 한 날 내가 볼 수 있는 영화는 뭐가 있을까 하여  고민하던 찰나, 한 편의 영화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천일야화'였다. 1,2,3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작품이었으며, 스틸샷을 보니 아랍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아이(관람차)'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꽤나 흥미로울 것 같아 기대를 하고 표를 연달아 예매하였다. 그리고 새벽잠을 뚫고 내려간 부산 영화의 전당-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난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영화관에서는 코골이 소리와 하품이 계속 터져 나왔다. 1편 상영이 끝나고 모두가 다 퇴장할 때 즈음 앞자리에는 관객과 달리 나가지 않는 VVIP들이 있었다. 영화가 너무 재미가 없었는지  앉아있는 VVIP 한가운데  있던 '허문영'씨는 유독 많이 지쳐 보였다.  필자는 내리 3편을 보면서 좌, 우, 앞, 뒷사람 깨우기 급급할 정도였는데, 입장과 퇴장을 2번을 더 반복하고 모든 시리즈가 완전히 끝났을 때의 영화관의 분위기는 '참 좋은 작품이네!! 잘 봤다!'의 분위기 보다 '이 어려운 걸 참고 견뎌냈어!'식의 일종의 사우나 오래 버티기 분위기가 팽배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주변에 코 골았던 사람을 열심히 깨우느라 (심지어 3편을 보았을 때, 옆에 있던 아저씨는 10분 뒤에 깨워달라고 했다.)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번 보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영화였지만, 너무나도 강렬했다. 영화이건 영화관의 분위기이건, 미겔 고미쉬도 이걸 아는지 천일야화 3의 마지막 엔딩에서 딸에게 하는 위로의 문구로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문구가 뭐였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순서


필자가 미겔 고미쉬와의 만남을 먼저 이야기 꺼낸 이유는 그의 전작을 봤음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겔 고미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기억도 나지 않는 전작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꽤나 신기한 일이다. 


흔히들 말하는 '시네마틱'이라는 것에는 '영화에 대한 순수한 긍정의 감정'이라면, 필자가 말하는 시네마틱은 영화에 대한 감정이 아닌 영화관이 중심이 된  감정이었기에  그날 강렬한 기억을 선사한 이 감독을 두려워했다.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미겔 고미쉬에게 있어 '시네마틱'은 무슨 의미인가? 


영화 중반부에 미겔 고미쉬와 모린은 말로서 표현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인적 사항에 기반을 둔 게 아니었어요. 캐릭터가 학교에 가든 말든, 일하든 말든 어린 시절이 좋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어요. 영화 중의 사건들 또한 캐릭터에게 방향을 가리키지 않아요". 이때 카메라는 그 말이 울려 퍼지는 응접실을 뒤로 한 체 그들의 미팅과 전혀 상관없이 촬영장을 가로질러 가는 한 여성 직원에게 주목한다. 사실 그녀의 동선을 주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영화의 성질을 감독 스스로가 말하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에 왜 여성 직원에게 주목한 것일까?  우리는 일단 그것이 롱테이크로서 찍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숏을 구분 짓지 않고 롱테이크로서 그 여성 직원의 움직임을 쭈욱 따라갔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히 '돌발 상황'이 아닌 의도된 데쿠파주- 영어권에선 콘티, 불어권에서는 숏과 시퀀스를 나누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다층적 행위-이다. 숏을 구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시점을 유지했다는 것이며 그 여성 직원이 다시 돌아와서 감독과 배우들이 앉아있는 응접실과 카메라 사이를 지나갈 때 여성 직원을 따라가지 않고 감독과 배우의 위치에서 카메라가 멈추었다는 것은 하나의 시퀀스를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숏은 무전기를 보여줄 때 바뀌는데,  관객은 무전기에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소리가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운동'이라고 치환한다면, 영화가 이 시퀀스에서 주목했던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의 움직임이고,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다. 결국 두 모습 다 '움직인다'가 핵심이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움직임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의 피사체를 따라가는 움직임이다. 


위 논지에서 조금 확대 해석하자면 무전기 숏 -고정된 물체에서 발생하는 파장과, 응접실 숏- 고정된 피사체 사이로 퍼지는 여성- 그리고 이를 비추기 위해 움직였던 카메라. 이 3가지 움직임이 시퀀스에 포함이 되어 있다. 


영화는 운동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셈이다. 미겔 고미쉬는 이 부분에서 꽤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영화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인가?


악동


봉준호는 2021년 칸 영화제 오프닝 시상식에 당당히 올라가서 '뤼미에르 영화에서 기차가 달린 이후로 이 지구상에서 영화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영화는 멈춘 적이 없다. 하지만 영화가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의 시간과 모습을 다 보여주었느냐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운동은 카메라가 디디고 있는 땅의 시간과 결을 달리하였다.  여기에는 2년의 커다란 공백기가 존재한다. 영화는 이것을 어떻게 메꿔야 하는가?  미겔 고미쉬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이  간극을 메꾼다. 그는 시간의 순서를 역순으로 배치한다. 영화 테넷에서 보여줬던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Discount 방식으로서 보여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것이 신선놀음처럼 이상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18일 날 정원을 가꾸고 17일 날 정원에 망을 연결하고 15일 날 정원의 틀을 만들었다. 무화과는 19일 날 완전히 썩었으며  15일 날 무화과가 살짝 상했고 5일째 되는 날에는 무화과는 정상이다. 시간의 흐름으로 본다면 우리는 완전히 결과물의 반대 방향으로서 역행을 하는 것이다.  미겔 고미쉬는 영화 속에서 이 영화의 콘셉트에 대해 배우들에게 직접 설명한다. " 오늘 한 게 어제로 가면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해결 못하고 거슬러 올라가죠" .  감독 스스로 말하길 '해결'이라고 말했다. '해결'은 문제와 그 원인을 반드시 수반한다. 무화과와 정원이라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이 만드는 건축을 역으로 재생한다면 결국 환원이거나 또는 무(無)의 형태로 진행된다. 이것은 '문제'가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약 사람의 행동을 과거로 되돌린다면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미겔 고미쉬가 말한 '해결해야 할 문제의 원인'일까? 과거로 돌아가면 '문제'라고 깨닫지 못하는데 과연 '해결의 원인'이 될 수가 있을까?


개를 잃어버렸는데 그 개가 정비소에 있는 시퀀스라던가, 야외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데 그 야외 수영장을 치우고 있는 시퀀스들은 원인과 결과를 표현하지만 이것이 '문제'임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분기점이라고 보일 수 있는 13일 차의 까를로토의 '촬영장 탈출 사건'조차 14,15,16,17일을 머릿속에서 되돌려 본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과거로 되돌리면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문제'가 아닌 '일상'이다. 고미쉬는 영화 속 '시간'의 물리력을 무력화 시킴으로써 '문제', '사건의 징후'를 '일상'으로 복구시킨 셈이다.  이 영화가 제목에서 8월은 알파벳을 거꾸로 쓰면서 다이어리는 순서를 지킨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큐멘터리'인 것인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은 몽타주로서 배치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이미지의 나열로서 보이지만 이것은 철저히 계산된 몽타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진짜 해결해야 하는 것 


20일 - 무화과가 심각하게 썩고 있다. 바람 소리와 함께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크리스타가 썩은 무화과를 치운다. 영화는 이때부터 정원을 가꾸는 크리스타를 보여준다. 선명한 햇살에 카메라는 뿌예지며 쇼트를 전환한다. 밤. 침실. 까를로토는 침대에서 자다가 일어난다. 그를 비추는 초록색 조명은 문득 정원에서 싱그러움을 뽐냈던 식물들이 까를로토의 집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민 때문인지, 잠을 설쳤는지 까를로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원으로 가서 눕는다. 누워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그곳에 나오며 20일이 끝난다. 정원에서 보여준 크리스타와 정원에 누웠던 까를로토의 연관관계는 무엇일까? 


2일째, 접견실 소파에는 맥주가 가득하다. 소파에는 스텝이 취해  누워있고, 다른 빈자리에는 개가 멀뚱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응접실에서 크리스타는 숙소 직원분과 차를 마시며 어제의 파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음식을 만든다. 1일째 밤에 파티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이는 정확히도 그날의 시퀀스는 00시에 24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20일 날 까를로토의  밤의 시퀀스의 이유를 19일 날 아침의 시퀀스인  주앙과 크리스타의 썸의 분위기를 목격한  20일 새벽의 까를로토의 심정으로 봐도 되고, 20일 날 밤에 그저 잠을 설친 까를로토가 21일 날 아침에 차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식을 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어진다.  즉 낮과 밤. 무화과가 자연스레 썩는 자연이 보여주는 세월과  인간이 인지하는 숫자- 인지적 시간의 방향성이 별개로 분리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를 거꾸로 돌려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고미쉬는 영화에서 '인지가 가능한 시간'을 제거하여 이미지를 관객에게 던져준다. 이건 꽤나 흥미로운 실험이다. 시간과 공간이 인지가 불가능해질 때, 이미지들은 서로의 상관성을 박탈당한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관객에게 전도가 될  때,  관객은 이 이미지들을 '이해'하기 위해  본인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재조립한다. 날짜의 역순으로 가든지 혹은 시간까지 역순으로 가든지 또는 화이트보드에 적힌 촬영 일정을 토대로 모든 것이 정방향이라 가정하고 영화의 방향을 믿고 따라가든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머릿속에 시간 순서로 재배치되는 이미지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비물질적이며, 서사의 흐름 없이 난립하는 이미지들로 넘치는 혼돈의 것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인 물체처럼 실체화 시키려는 충동을 유발하는 것. 이 충동을 유발하는 것은 오직 영화만이 가능하다.그러니깐 미겔 고미쉬는 자기가 찍는 것을  영화가 아닌 촬영 현장이라고 주장하면서,  관객의 머릿속에 관객 스스로가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이다.  (좀 더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보았던  영화는   스스로가 무의 존재로 가고 있다.)  우리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기억되는 과거의 이미지들은 러닝타임 동안 보고 있는 이미지와의 시간차로 인한 변증법을 통해 재배치가 되며, 자연스레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와 머릿속에 잠재된 이미지가 간극이 생긴다.  그 간극화된 이미지, 머릿속에 재배치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지난 2년간 통과했던 코로나의 흐름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코로나 시국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타 영화와 달리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가 배우들과 응접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할 때  '캐릭터가 만든 문제가 없어 해결하지 못한다'라는 대사를 내뱉은 이유는 영화에 대한 배우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 지난 2년간의 진짜 문제-  '망각이 아닌 보존했어야 했던 우리의 일상'을 영화화하기 위해 던진 말이다. 어떻게 영화화했을까?  미겔 고미쉬는 여기에 아주 원초적인 답변을 한다. 사이키가 수놓은 밤빛, 밤하늘의 별마저 메시아적인 힘을 빌려 형형색색으로 물들인다. 그리고 시퀀스의 배치를 몽타주 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특수효과가 없다. 오직 순수한 영화적 요소만이 존재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파워 오브 도그 -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