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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un 12. 2022

우연과 상상

과연 나는 제대로 영화를 본것인가? 


'우연과상상'은 정확히 2019년에 1,2화를 3화는 2020년에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을 때 ,

촬영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니깐 이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이후에 촬영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지점이 날 아래와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고, 일요일날 지인들과의 만남 이후에 지울까 미천한 능력이 다 드러나 이것을 올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2022년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남기기 위해 글을 발행한다. 


우연과 상상 

필로의 객원 필진인 미우라 데쓰야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로메르의 세계에 대해 작성한 글을 근거 삼아 ‘우연과 상상’이 로메르의 연출적 특징인 ‘실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비평가가 지적한 글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수렴이 없기에 이 글에 반박해 보자면, 왜 하필 ‘실패’라는 연출적 특징을 ‘드라이브 마이 카’ 이후에 했는지가 결여되어 있다. 좀 더 과감하게 비판하자면 미우라 데쓰야는 참 순진하게도 에피소드 1,2,3이 그저 나열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이 영화는 왜 하필 이 옴니버스여야 하고 이 옴니버스의 순서는 ‘마법’,’문을 열어둔 채로’ , ‘다시 한번’ 이렇게 되어 있을까?

‘마법’

언덕 위에서 촬영 중인 모습을 롱숏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메이코가 프레임 한가운데 있다. 성공적으로 마친 사진 촬영을 뒤로하고, 그들은 각자 헤어지는데, 우연히 메이코와 츠구미가 동석을 한 채로 택시에 타게 된다. 츠구미가 만난 남자 이야기에 한껏 들뜬 메이코의 대화가 택시 안에서 지속된다. 이 대사 시퀀스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그것은 이 시퀀스가 어떤 ‘반전’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드라이브 마이 카’와 전혀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다카스키’가 뒷좌석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굉장히 중요한 시퀀스와 이 영화는 정확히 ‘대립’이 된다. 일단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다카스키’는 ‘오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에게 있어 ‘오토’는 이미 죽은 자가 아닌 그들의 옆에 떠돌아다니는 자이다. 그들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서로를 안다기보다 ‘오토’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굉장히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가 그들의 대화로서 서로에게 점점 ‘미스터리’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메이코와 츠쿠미의 대화에서 나오는 사람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그들의 대화가 지속될수록 ‘그 남자’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만큼이나 그 남자가 츠쿠미, 그리고 메이코에게 어떠한 존재로 남아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전작이 ‘부재’에 대한 ‘쌓을 수 없는 말들’이라면 이번 작품은 ‘존재’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말들’인 셈이다.


이 미묘한 차이는 카메라로서 확실히 알 수가 있는데 ‘주행하는 도중에 포착하는 뒷좌석의 카메라 앵글’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육체가 없는 오토'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한 30도 법칙과 달리 이 시퀀스에서는 이 법칙을 유지함으로써 남자를 눈앞에 상상하는 화자를 보호해 준다. 결국 이 영화의 카메라는 철저하게 ‘카즈키’를 위한 카메라이다.

(여기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텐데 30도 법칙은 애초에 관객의 시선이 어색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였다.

즉 누군가의 시선이 있다는 가정하에 들어가는 법칙이 서브젝트 숏으로 대체되어 무시당했을 때, 이 누군가는 혹시 관객이 아닌 오토가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이 ‘카즈키’를 위한 카메라는 ‘우연’히 츠쿠미가 메이코에게 말한 이야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카메라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 메이코가 모델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츠쿠미 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볼 수 있고, 메이코도 카메라를 카즈키로부터 뺏어오고 싶은 사람이라는 점을 ‘시점 체인지’(허그를 기다리는 씬)으로 확실히 해둔다. 

그녀의 장력이 후에 카메라를 줌인하지만, 그 힘은 꾸준할 수 없다. 그녀는 힘을 조절하고 만드는 사람이 아닌 단순히 수동적인 피사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스스로 카메라에 담기길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카메라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셈이다. 


‘문은 열어둔 채로’ 

주도권을 가지고 피사체를 찍을 때, 대상이 되는 피사체는 정말 멈춰 있고 수동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촬영 이후에 지나가는 전철과 나뭇잎들은 주체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에피소드의 첫 장면. 교실 밖에서 유리를 통해 안을 보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듯 커다란 유리가 교실 안의 사람들과 카메라의 위치를 구분 짓는다. 그러다가 영화는 불현듯 교실 안으로 진입한다. 이내 건넛방에서 세가와 교수에게 부탁하는 사사키의 소리가 들려온다. 재미있게도 카메라는 쉽게 진입하지 않고 들어온 방 안쪽에서 건넛방에 위치한 세가와 교수가 보이게끔 위치한다. 그 위치에서 바라보는 세가와 방의 모습은 사사키의 목소리가 커지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려던 학생들에 의해 앞이 가려져서 정확히 그 장면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제서야 카메라는 다시 세가와 교수 방으로 점프한다. 즉 카메라가 피사체를 보고 접근하려고 할 때마다 형체가 그 앞을 가로막는 셈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방문을 닫으려는 다른 교수의 행동에 세가와는 방문을 열어놓으라고 말린다. 문을 연다는 것은 ‘논쟁거리’를 피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가와가 창밖을 보는 장면 없이 그 자리를 고수하며 시선을 계속 문밖에 두었다는 점은 조금은 다른 의도처럼 보인다. 우리가 세가와의 자리에 앉아 보인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건 문밖의 풍경이 보일 것이다. 유리로 가릴 수 없는 문밖의 풍경. 다만 밖이 보이는 공간은 앉아 있는 자리로부터 꽤나 협소하고 멀지만 학생들은 계속 지나가고 누군가 계속 들어오는 곳이다. 즉 세가와의 자리는 관찰이 가능한 자리인 것이다. 시점은 권력자의 것이라는 걸 상기한다면 그의 관찰은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문이 닫힌 것이란 문밖으로 육체를 내보지 않아도 TV에 나올 수 있는 본인의 힘의 위상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다. 이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서 본다는 것에 무기력했던 가후쿠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위치이다.

그래도 학생들과 달리 우리는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카메라를 막는 요소들을 피해 우리는 언제나 점프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줌인이 없고 점프 숏만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점프 숏은 팽팽한 권력의 구도를 한 번에 무력화시킨다. 

그 방 안에서 쫓겨난 사사키는 그 방에 들어갈 수 없고, 자신의 섹스 파트너에게 부탁하여 복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녀가 그 요청에 응한다. 여기에 과연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나오의 외도가 호기심과 섹스 불만족이라는 1화의 메이코의 연장선에 있는 여성이라면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더 나아가 이 여자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오토가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전이였다면? 그녀는 당연히 이 제안에 수락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여성이었기에, 그 단락을 낭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닫힌 방문으로 인해 그녀의 목소리가 그 방에 채워진다. 세가와가 쓴 글은 나오의 목소리로 낭독이 되어 소설 속 여성 마냥 단어를 성기처럼 어루만져 주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그는 단어가 주는 ‘에로틱한 페티시즘’보다 자신의 권력을 향한 시선을 더 중심에 놓는다.

(영화는 그가 일어서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에 내재된 폭력적인 성질로 인해 끊임없이 남근성의 상징으로 꽤나 유치하게 비유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는 마치 카메라처럼 문안이 아닌 문밖으로 사정하고 싶은 사람인 것이다. 마치 렌즈의 뚜껑처럼 그는 문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닫는 순간 카메라는 밖으로 점프하고, 안에서 세가와가 여는 순간 카메라는 다시 한번 복도 밖으로 나가는데 이때 단순히 ‘권력’이 아닌 것이 밝혀진다. 이것은 어떤 교훈을 동반한다. 파워 게임에 진다면 내가 누군가를 엿보기 위해 나 또한 관음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무치는 진실 말이다. 관객은 방 안의 인물들의 행동에 의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녀가 벽 뒤로 숨음으로써 피사체를 독점할 권리를 세가와만이 가졌을 때, 안으로 들어오는 점프 숏은 마치 줌인과도 같은 관음의 성격을 동반한다. 카메라의 주도권은 관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좌지우지하는 세가와에게 있는 것이다. 주도권은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온다.


바로 권력자 모르게 모든 말이 ‘녹음’이 된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정령이라고 생각한 문장들이 타인의 목소리로 나와서 단어들마다 새로운 원초적인 힘을 부여하게 되는 모든 것이 되는 순간들이 일종의 ‘컷’ 없이 녹음이 된 셈이다. 그는 흥분할 수밖에 없다. 나의 주도권을 벗어나서 새로운 무언가가 질서를 갖는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으니, 이와 별개로 나오의 입장에선 낭독 후에 비어 있는 그녀의 마음속 공터 안에 본인의 언어로서 채우라는 교수의 조언으로 상당히 들떴을 테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남편과 섹스 후에 자기 마음을 낭독했을 것이다( 심지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설정과 같은 딸이다. ) 하지만 그 언어가 낭독이 아닌 메일로 써질 때, 그녀는 글을 삭제하기 바쁘고 오타를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은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제론’이란 바이러스가 퍼져서 우편의 시대로 다시 회귀했다는 것이다. ‘문을 열어둔 채로’에서 메일 전송에 실패해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와 별개로 ‘다시 한번’이라는 부제 또한 여성이 카메라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거나 여성이 음성과 문자 모두에게 남자에게 주도권을 잃어서 쓴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아무튼 영화로 들어가면 이 에피소드에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모두가 기억을 제대로 못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세가와와 사가와를 틀렸던 나오의 또 다른 형태의 에피소드일까? 분명히도 다른 에피소드들보다 활자가 많고 활자에 관련된 기억인 남편의 ‘활자’를 정확히 기억한 것과 반대로 사람들은 활자가 없는 오직 ‘말’이나 행동으로 오는 것들에 대해선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저장이 없이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억들은 서서히 사람의 머릿속에 지워져 간다. 하지만 그 과거의 순간을 향해 반드시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존재한다. 아야와 나츠코가 서로에게 하는 행동은 기억이 상실되기 전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짝사랑에게 그 옛날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코바야시와 모카가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편상’ ,‘파트너’라는 이상한 단어를 쓸 정도로 서로의 세계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꺼이 서로를 위해 연기를 해준다.

연기는 블루레이로 인해 우연적인 기회를 갖게 된다. 아들을 이해하는 아야와 아들을 이해 못하는 나츠코는 블루레이가 도착이 되어서야 무대로 올라간다. 언뜻보면 아들과 엄마와의 연극처럼 보이지만 그 곳에서 블루레이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연기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대사를 체크하면서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이 되다가 모카가 진짜 마음을 내뱉어지는 순간 코바야시는 움찔한다. 그때 아들이 나타나서 코바야시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그녀가 움찔했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코바야시가 움찔했던 이유는 그저 대사에 빠져서가 아니라 모카가 코바야시의 과거 속 누군가의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위한 거울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통해 굴절되어 보여주고 셈이다.(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연기와 차별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모카는 기꺼이 코바야시의 연기 파트너가 되어 주기로 한다. 이 둘의 과거 속 상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은 두 번째 연기에서 좀 더 여유와 진솔함을 동반한다. 코바야시의 발언은 모카의 입장에선 미카가 굴절된 거울이다. 그녀 역시도 진솔하게 말을 한다. 


거울이라는 특성은 동일시라는 지점이 있는데 첫 번째에서 코바야시가 다가오거나 두 번째에서 카메라가 기꺼이 줌인을 유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화는 거울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깨고 싶어 한다. 즉 그들의 말이 과거의 상대방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길 원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적 바램으로 아들의 입장으로 인해 움찔했던 코바야시의 아쉬움은 줌인으로 인해 기꺼이 손을 맞잡게 한다. 이로써 과거의 연장선을 떠나 시간의 운동성에 편승하며 제논의 역설을 무너트리게 된다.

(서로 다른 배역의 양면성은 이미 에스컬레이터 시퀀스가 전조였을 것이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에서 연기를 하는 장면은 앞서 에피소드들과 드라이브 마이 카 연결성과 마찬가지로 야외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시퀀스와 흡사한 구조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극중 배우들이 두 여배우의 연기에 놀란다. 특히 다카스키는 가후쿠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따지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계속했던 것은 그저 대사를 어떠한 감정선 없이 읽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시퀀스가 되게 의아할 수밖에 없다. 가후쿠가 말했던 ‘스파크’는 실내에서 보여주었던 ‘연기’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 일어난 우연성을 발견하는 것은 오직 연출자의 몫이지만 삶의 우연성을 발견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파트의 줌인은 일상을 마법의 순간으로 바꾸는 줌인인 것이다. 꿈꾸어 왔던 상상이 우연을 거쳐 해피엔딩으로 나온 것은 이 에피소드가 유일하다.


사실 영화에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 할리가 만무하지만, 각 에피소드마다 우연이 무엇이며 상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마 관객들마다 다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다만 ‘상상’과 ‘우연’이 아닌 ‘우연’과 ‘상상’이라는 순서를 정해줌으로써 영화는 상상이 몽상이 되지 않게 만든다. 그 이유는 이 영화 속 우연이 영화가 거래의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 우연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우연성을 기대었기에 삶의 변칙성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변칙성은 정재승 교수가 설명했던 상상의 기본 조건- 탄탄한 근거를 갖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우연들과 상상들이 ‘남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 모든 것이 키틀러가 말한 매체의 특징인 성별로 인한 분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하마구치 류스케가 ‘전복’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지는 여전히 오리 무중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각기 다른 날짜에 촬영이 되었는데 1,2화는 2019년에 3화는 2020년- 드라이브 마이 카가 코로나로 인해 촬영이 중단되었을 때 촬영한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굉장히 기괴해 보인다. 왜냐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나왔던 마스크가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독 3화만이 거짓으로 속이려는 연기가 아니라 거짓이 진심이 되는 에피소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출을 제외한 어떤 부분에서 이 부분이 진심이라고 느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카메라- 주도권(시선)- 그리고 연기(거울)을 통해 각 에피소드별로 점층적 결말에 도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점층적 방식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정확한 ‘반’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작의 힘이었던 -카메라- 주도권(시선) -연기(거울)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분할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그가 이 힘을 세 가지로 분할 한 이유는 영화라는 물질을 삶을 연기하는 배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곰곰이 추론해 본다. 이제 그의 ‘합’의 결말을 기다릴 때가 온 것 같다. 


p.s

3화에서 그들이 누군가에게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죽은 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재난이 나오지 않지만 3회 자체가 우연적인 재난에 상처를 치유하는 상상이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더불어 3편의 상상이 유일하게 성공한 이유는 남성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게토화가 아닌 권유로 인해 이루어 졌다고 보았다. 그 권유는 코바야시의 남편에 대한 존중으로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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