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투어

Tour

by Tony

미겔 고미쉬가 정식으로 우리나라 극장에 개봉을 하였다.

필자는 그의 전작 중에 [타부], [천일야화] 3부작,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를 보았다. 아마도 현재 핫한 이베리아 감독들 중에 제일 많이 찾아본 감독이 아닐까 싶다. [타부]에서 [더 트스거오]까지의 그의 작품을 보니 하나의 특징이 보인다. 그는 영화의 힘을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영화의 흐름은 각기 다른 힘을 지닌 쇼트들의 나열이다.

이건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시간에 따라 흐르는 사건들, 그리고 그 전제가 주는 인식의 틀 속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베리아반도의 사람들이나 태국에서 배회하는 감독은 이에 대해 반기를 든다. 과연,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해체하는 것은 영화 자체를 시간에서 해방시키는 것일까?

혹은 오히려, 시간을 더욱 강하게 증명해버리는 결과가 되는 걸까?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러시아의 문학들, 20세기에 만들어진 미국의 소설들,

고전 중국 문학들은 21세기에도 한국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 여전히 읽히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들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 소설이나 문학들이 지금도 읽힌다는 건 국경과 문화, 언어를 초월한 힘이 전방위로 발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소설들을 추천하거나 읽는 것은 '교양'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의 영화들을 추천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그 옛날 영화가 재미있냐'는 반문이 바로 나온다. 그 당시의 배우와 문화, 어색한 대사처리, 특수효과는 현대 관객들에겐 거대한 허들이 된다.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영화는 카메라로 찍은 예술'이기 때문이며 자연스레 '영화가 그 당시의 시간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스토리에 대해 상상력을 요구할지언정, 알지 못하는 세계에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상상력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다큐의 역할로 인해 발생하는 관객과 영화의 시대 차이의 이질감은 문자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상상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영화의 생명력을 좀 더 길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의 단계로 도달해 보자.

시간의 흐름에 배열된 쇼트들이 각자 반기를 든다면 시간과 쇼트, 그리고 쇼트와 쇼트들은 어떻게 서로의 힘을 보존하고 발산하는가. 미겔 고미쉬는 전작 [천일야화]에서 뻔뻔하게도 현대 포르투갈에서 아라비안나이트 시대의 의상을 입힌다. 그들의 발언과 미장센은 포르투갈의 현재와 동떨어지는 듯 보이지만 이내 중첩되고 폭발하며 흩어진다. 그에게 고전 소설은 분명히 '시간을 이기는 예술'이다. 시간을 다른 시간대까지 번지게 만드는 건 '구술'이고,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현실'이다. 영화는 이것을 증명하는 장치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선 스토리의 붕괴가 시간의 붕괴와 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내 구술의 힘으로 쇼트가 살아난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그의 내러티브가 된다.

이 영화도 이 궤를 같이한다. 에드워드의 시간과 몰리의 시간은 정확히 1시간씩 분배되어 잇다. 에드워드의 붕괴와 이를 복구하려는 몰리는 결국 붕괴한다. 17-18세기 포르투갈 상인들이 동아시아를 누비던 흐름과, 에드워드-몰리의 동선은 시간적 초월을 통해 중첩된다.. 이것이 '그랜드 투어'라는 명칭으로 21세기의 아시아 풍경들과 겹칠 때 거북할 수밖에 없다. 또는 장 뤽 고다르나 장 르누아르가 보여주었던 아시아에 대한 시선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림자놀이의 순수한 동력을 찾으려는 영화광의 여행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영화의 숙명처럼 유독 사람의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원으로 돌며 계속 무언가를 집고, 만지고, 채취한다.

이 영화의 노골적인 상징들에서 내 눈에 제일 들어온 것은 '언어'였다. 이 영화는 영어, 포르투갈, 프랑스, 베트남, 중국어, 태국어 등 5~6개의 언어가 나온다. 영화 내러티브에서도 에드워드는 중국어를 잘 못 알아 들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언어들은 자막이 잘 안 나올 때가 많다. 문자는 거부가 되고 오직 말이 두둥실 떠다닌다. 그 떠다니는 말은 오직 해당 쇼트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결합으로 영화는 이것이 정형적인 기록이 되길 거부한다. 이 영화의 화자가 여려 명인 이유, 컬러와 흑백, 20세기와 21세기를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국 귀족들이 갔다는 그랜드 투어는 이제 21세기에서 장소도 시간대도 모호한 스튜디오로 변형된다. 인종, 시간, 언어, 국경을 어떠한 방해 없이 모두 통과하는 영화는 선형의 끝인 죽음과 마주칠 때 살아나는 기이한 존재인 셈이다. 죽음을 통해 살아나는 존재로서 영화는, 역설적으로 타 문명과 언어를 통과하며 정복한 제국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미겔 고미쉬는 영화의 성질에서 제국주의를 포착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스크루볼 코미디의 틀을 빌린 이유가 드러난다. 통상적인 스크루볼 코미디가 보여주는 빠른 대사나 연애 신경전은 사라졌지만, 대신 비상식적 상황, 즉 제국주의적 시간성과 현재 이미지의 괴리가 낳은 '비상식'과 쇼트들의 대화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그래서 그의 이번 시도는 상당히 불쾌하면서도 도발적이며 지극히 그(유럽인) 답다는 생각이 든다.

미겔 고뮈시는 그다음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엔딩을 장식하던 "Beyond the sea"가 유난히도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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