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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영화란 이런것일까?

by Tony


류이치 사카모토와 기타노 다케시는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영화판에 들어왔다. 그 당시 조 감독은 최양일이었다. '반골' 그 자체였던 오시마 나기사의 기념비적인 영화인 교사형은 말할 것도 없고, 최양일은 피와 뼈로 자신의 본류에 도달한다. 뒤 세대인 류이치 사카모토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사회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의 유아적 특성을 태생적인 폭력성과 결부하여 '키즈 리턴'이나 '기쿠지로의 여름'을 내놓는다.


오시마 나기사의 그늘 아래에서 3명이 선택한 길은 다 달랐지만 거물이 되었다. 그중 세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자신의 노욕을 히데요시로 투영하셨다. (나는 아웃레이지가 과소평가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류이치 사카모토와 같이 영화판에 들어왔으며, '키즈 리턴'이라는 작품을 만든 기타노 다케시는 그의 자녀가 만든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정말 곤란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첫 번째로 강조되는 순수성이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의 차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영화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 행위를 하였다. 어떻게 했는지와 관련해선 [크로니클]과 같은 초능력자인가라는 일종의 망상이라도 시도해 봐야 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영화가 진행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에선 그들이 편의점에서 담배나 맥주를 구매하는 장면도 없고, 키스하는 장면도 없고,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일탈의 순간이 아닌 그들이 마주친 상황만을 보여준다. 이런 태도는 자연스레 두 번째 문제와 맞닿는데 그것은 회피성이다. 많은 시퀀스들이 자연스레 다음 단계를 떠오르게 함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오버랩시켜서 상황을 장난 식으로 축소시키거나 과감하게 다른 시퀀스를 이어붙이면서 상황을 회피하고 문제의 강도를 약화시킨다. 여기에 남는 것은 캐릭터의 옷선과 상황의 감정들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계속 나오는 '주의'라는 글자이다. '주의'라는 글자를 영화에서 계속 보여주지만 '주의'앞에 적힌 글자는 보여주지 않는데, 결국 이런 질문으로 뻗어나간다. "여기 5명의 학생은 'xx 주의'에 반발하는 학생일까 아니면 무너진 'xx주의'의 공터를 배회하는 학생일까?"

이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을 때, 마지막 졸업식 장면에서 감시 카메라 시스템의 해체에 반발하는 아이들의 신체를 프레임 밖으로 빼버린다. 그리곤 유타가 결정하고 강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이 모든 외부의 폭력이 이들의 우정, 꿈을 방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 폭력에 떠돌아다니는 너무나 슬픈 학생인 셈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코우의 이야기는 자이니치에 대한 꽤나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브 우퍼의 이동을 도와주다 경찰에 의해 퇴장할 때 영화는 코우가 아닌 유타에 집중한다. 그러니깐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심각하지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학생들의 표정이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영화의 한계가 드러난다. 영화 스스로가 회피하면서 동시에 순수성을 강조할 때 유타와 코우 그리고 친구들이 맞이하는 졸업의 의미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인 척하는 이미지'로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애들이 절대 하지 않는 것이 SNS 임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이 영화가 SNS에 올려진 하나의 이미지지 않을까? 왕가위의 영화에서 시대성을 뺄 때 SNS에 올리기 좋은 레트로 이미지로 남는다면, 이 영화야말로 SNS에 올리는 사진과도 같은 영화인 셈이다. 문제는 다리에 적힌 엉망진창인 한글처럼, 모든 문제점은 소거되고 아름다운 사진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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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건 일본이건 우리는 과연 본질을 통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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