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퇴장
영화가 괴상망측하다고 말해보고 싶다. 1시간 20분 동안 톰 크루즈는 말을 쉬지 않는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그에게 계속 부탁하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그는 계속 신념을 설파한다.
액션보다도 말로서 계속 이어나가는 영화는 잠수함 시퀀스 이후에 톰 크루즈의 말을 정말 과격할 정도로 줄여버린다. 도대체 왜 이런 컨셉으로 영화는 밀고 나간 것일까?
정반의 배치
적의 형체를 끝까지 드러내지 않았던 『탑건: 매버릭』이 관객을 영화의 정치성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이번 작품에서 AI의 비육체화 설정은 SF가 아닌 액션 장르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위협의 강도를 크게 낮춰 버린다. ‘엔티티’라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던 인류 위기는 화면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비밀 벙커에서 D-데이가 서서히 무산되는 상황임에도, 혼돈에 빠진 군중 신도 없고 평범한 일상조차 비추지 않는다. 21세기 영화들이 리얼리티를 지향해 온 점을 떠올리면 상당히 의외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사태를 실질적 위협으로 규정하며, 전 세계가 맞닥뜨릴 미래와 IMF 계획의 위험성을 계속 영상을 통해 경고한다. '엔티티'와 접속하는 시퀀스에서도 '엔티티'는 그리스 신화 속 신탁처럼 경고한다. 이 수많은 경고들과 이에 반응하는 톰 크루즈의 언변은 영화 속의 위협의 스케일을 지나치게 부풀려 놓는데 일조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위기는 ‘세계 멸망’이라는 거대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AI도 그 파괴의 도구로 탑승한다. 그런데 이단 헌트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감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한다.
영화는 시퀀스 배치만 보더라도 충돌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이단 헌트가 파리를 구하기 위해 적진에 침투했을 때, 그는 드가에게 “총을 내려놓으라"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드가도, 파리도 쉽게 무기를 내려놓지 않자, 이단은 다시 한번 간청하고—결국 둘 다 총을 내려놓는다. 그 직후 이어지는 장면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가 총을 집어 드는 모습이다. 이뿐인가? 알래스카로 향한 작전에서 러시아 요원이 겁박하며 “나는 개 같은 건 키우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들의 작전이 실패한 이유는 ‘개밥을 주는 행위’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하나의 씬 안에서도 정반대의 모순이 연이어 충돌하는 것이다. 영화의 이 모든 충돌은 이단 헌트의 신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이다.
이런 극단적 충돌은 거대한 부조리나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킬 때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방식이다. 앞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줄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에서는, 하나의 앵글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이 충돌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에서도 ‘산드라’가 죽은 남편의 세계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구조가 반복된다. 최신의 트렌드를 보자면 이 영화는 꽤나 올드한 방식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알래스카에서
알래스카에서 만난 인물은 1편에서 이단 때문에 좌천당했던 윌리엄 던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서 그를 가장 반가워하는 인물이 ‘벤지 듄’이라는 것인데, 벤지가 “던로가 CIA의 전설적 요원”이라고 언급하지만 실제로 놀라는 건 캐릭터들보다 관객이다. 영화는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1편의 던로 등장 장면을 몇 차례 반복해서 보여 주는데, 이는 단순한 암시를 넘어 복습의 효과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그의 등장은 유튜브를 달구는 ‘근황 올림픽’과 같은 단발성 이슈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좋은 미디어 프로그램이 시청자와 쌓아온 관계 자체가 곧 하나의 ‘역사성’을 만들어 내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관객이 던로의 등장을 통해 놀라고, 복습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이 ‘역사성’ 덕분이다.
또 주목할 점은, 이단 헌트의 역할을 벤지를 통해 대신 보여 줌으로써 관객과 마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순간의 역사성은 곧 이단 헌트의 과거에 대한 파편적 흔적이기도 하다. 이 지점부터 이단 헌트의 대사는 급격히 줄어드는데, 우리가 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그 행동을 지켜보며 기대감을 쌓아갈 때—그 모든 기대 자체가 바로 ‘이단 헌트’가 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방식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셈이다.
영화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앙드레 바젱과 추종자들이 흥분했던 - 영화사 최초의 다큐라고 불리는- [북극의 나누크]를 기억할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참 오랜 시간 에스키모를 등장시키지 않았는데 윌리엄 던로를 통해 에스키모 아내를 등장시킬 때 이 영화의 진짜 야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플래허티의 업적이 에스키모의 행동을 녹화한 것이라면 맥쿼리는 이 북극에서 플래허티와 동일하게 톰 크루즈의 행동을 녹화한다. [북극의 나누크]에서 에스키모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것이 '다큐'라고 할 정도의 활력성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톰 크루즈의 말이 들리지 않아도 행동으로서 액션의 활력성을 얻으려고 한다.
그린베레와 미션의 명성 사이에서
영화가 의도한 상반된 구조들이 이단 헌트의 신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알래스카부터는 시리즈의 시작인 [미션 임파서블1]과 다큐의 시작인 [북극의 나누크] 설정을 묘하게 겹쳐 놓는다. 플래허티처럼 영화의 제작자이자 주연이기도 한 톰 크루즈의 행동을 촬영한 셈이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올드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발생한다.
존 웨인의 [그린베레]라는 작품을 거론하고 싶다. 서부극의 생명이 끝날 즈음 존 웨인은 할리우드 최초로 월남전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간 게 아니라 미시시피를 베트남 정글처럼 꾸며놓고는 베트콩을 척살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때는 1968년이었고, 유럽에선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시대가 문을 두드리던 그 순간이었다. 존 웨인은 시대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과 명성을 앞세웠다.
이 영화도 그 비슷한 루트를 따라간다. 코로나 시기에 '탑건'으로 살아남았지만, 끝내 신뢰가 깨져버린 이 세계의 정치 지형에서 그가 뛰면서 증명해야 할 '사람이 사는 공간'이 영화 안에도 우리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다. 증명을 위해 마련된 판에서 증명을 위한 사회가 사라졌다는 패러독스. 시대의 변화로 인해 영화가 시대성을 잃어버리고, 영화의 구조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이 때문에 비행기 장면 이후의 이단 헌트는 너무 애처롭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미션 컴플리트도 외치지 않는다.) [북극의 나누크]에서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플래허티의 자막과 같이 톰 크루즈의 대사보다 주변 사람들의 독백과 대사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존 웨인과 달리 '지금은 말을 하면서 퇴장할 시점이 아니다'라는 걸 본인 스스로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