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난 뒤 문득 궁금해졌다.
"저 마을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
간판 없이 꼬불꼬불한 길을 거쳐 도착한 마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는 감독의 전작 도주왕과 스테잉 버티컬에서 보았던 방식이다. 어디에 있는 마을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영화에서는 도시명은 존재해도 그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경찰들은 '시간대에 무엇을 했는지'만 물을 뿐이다. 뱅상의 출근 시간대와 주인공인 제레미의 취침 시간을 대놓고 표현한 영화의 태도를 보면 아이러니하다. 왜 시간은 정확하고 장소는 불분명한 것일까?
모두가 사랑한 마르틴
제레미는 마르틴의 가족사진 특히 바닷가에서 찍은 마르틴의 사진을 유심히 본다. 수영복 뒤에 감춰진 성기에 시선이 머물자 제레미의 눈빛에도 욕망이 어른거린다. 그 순간 마르틴 부인이 제레미에게 묻는다.
"그에게 고백은 했니?" 그러자 제레미가 조용히 대답한다.
"아니요"
이 이상한 삼각관계는 뱅상이 잠든 제레미를 억지로 깨우며, "너 우리 엄마랑 잤냐?"라는 묻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실제로 마르틴은 제레미가 샤워 중일 때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을 가져다 놓는다. ) 이후 영화는 마르틴의 빈자리를 제레미가 대신 메꿔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제레미는 마르틴이 일했던 곳을 인수하려고 하고, 미망인의 옆자리를 메꾸려고 한다. 미망인도 싫지 않은 눈초리다. 오직 그를 거부하는 것은 마르틴의 아들이자 친구라고 했던 벵상 뿐이다. 이는 부계(父系)의 계승이 아닌 ‘대체(代替)’에서 생겨나는 갈등이다.
사자 세계에서 우두머리가 죽으면 새로운 수컷이 암컷과 새끼를 독차지하며 기존 새끼를 죽이는 것처럼, 뱅상과 제레미 역시 '아버지'라는 자리를 향한 투쟁에 가깝다. 과연 이들의 충돌은 성적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 본능 때문일까?
그를 지켜보고 있는 신부
이 영화에서 신부님은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등장한다. 신부님이 영어로 'Father'라고 불리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기호이다. 영화를 같이 본 프랑스인의 조언으로 설명하자면, 프랑스에서는 '시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마을 한가운데 '빵집'과' '교회'가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렇기에 마을에 '빵집'이 없다는 것은 사실 이 마을이 '쇠락하고 있다'라는 간접적인 의미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는 제빵사가 단순히 '빵을 만드는 직업'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인의 조언을 상기하자면 영화에서 보이는 제레미의 부계 대체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부계의 대체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하고 나약한 마을을 어떻게 해서든 이어보고 유지해 보겠다는 영화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듯이 이 본능적 행위의 '정당성'은 '정신'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는 의식을 지배하는 잠재적인 것이 '유교'라면, 프랑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이자 이를 '신의 이름'으로서 허락해 줘야 하는 것은 '카톨릭'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신부의 발기된 성기, 그리고 신부님이 하는 고백은 가냘픈 사랑의 행위라기보다 '동성애자'라고 오해받음으로서라도 유지되어야 하는 '아버지의 신화'에 대한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백인 셈이다. ( 신부는 버섯을 성체처럼 먹는다)
단검인가 자비인가
'가족' 은 그 나라와 시대 문화를 알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 조직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과 모습들은 사 구성원의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집의 유일한 통로인 '문'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일까? 근래 한국의 주거에선 '문'이 갈수록 많아지고 두꺼워지며 삼엄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면, 프랑스인들의 집 문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묻고 싶어진다.
기로디의 전작 '스테잉 버티칼'과 '도주왕'에서 가정집의 문은 너무나 쉽게 열린다. 그의 집은 '욕망'에 한없이 너그러웠고, 식어버리면 한없이 차가워졌다. 애초에 집이 나오지 않는 '호수의 이방인'은 어떠한가? 그래서 그의 영화는 지리를 관객과 공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추적이라는 장르의 서스펜스를 지양하고, 지형을 욕망으로 표현하는 서스펜스를 지향했다. 기로디에게 있어 지형이나 건축은 사람의 무의식 기호이며 표상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위치는 실존의 위치가 아닌 무의식의 좌표에 위치한다.
이 영화도 어찌 보면 그의 전작에서 태도의 기조는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집안에서 기어이 '아버지'의 역할로 대체되는 것에서 솔직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마음에 걸렸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은 '물리적 위치'가 존재해야지만 나오는 '개념'이다. 여기에 저소득일수록 일찍 일어난다는 사회 계급적인 불편한 진실은 이 영화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뱅상이 살아있을 때만 표시되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벵상 이후의 제레미의 시간은 사실상 무덤에 있는 죽음의 시간과 같을 거라는 감독의 불길한 고백이 보일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미세리코르디아는 사전 그대로의 의미인 '자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향한 또 다른 뜻 '단검'이 될 것인가? 지금 프랑스인의 사고(思考)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 축축하고 어두운 '에덴'에서 나올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