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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un 24. 2022

아네트

I killed them

 1.

무대에 올라간 헨리에게 관객들이 묻는다. “왜 코미디언이 됐죠?”.   헨리는 돈도, 인기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곤 자신은 심연을 동정한다고 답변한다. 외화면에서 “심연이 뭐지?”라고 묻는 질문에 헨리는 멍청하다는 듯 ‘abyss’를 한 글자 한 글자 읊어준다. 이처럼 카메라는 관중들과 헨리의 문답을 쇼트와 역쇼트가 아닌 롱테이크처럼 찍었다. 이런 시점은 자연스레 영화 속 관중과 영화 밖에서 “아네트”를 관람하는 관객을 겹치게 만든다.  서로 다른 위치의 관객이 하나로 일치가 되는 것이다. 이 일치성의 유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헨리가 그녀와 약혼을 했다고 고백을 하는 모습과 총소리에 무대에서 죽는 연기를 하는 찰나에 극장 안에 있는 관객을 보여주며 쇼트를 분절하고, 이로 인해 자연스레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와의 연결고리 또한 분절한다. 그 즈음 오페라 배우인 안도 마찬가지로 커튼콜을 하면서 관객들에게 박수와 꽃들을 받는다.

 공연을 끝내고 안을 데리러 온 헨리에게 안이 질문한다.

“공연이 어땠나요?”

 헨리가 대답한다. 

“I killed them,”


무대에서 웃음으로 관객을 죽여야 하는 헨리와 자신이 죽어야 박수받는 안의 아이러니는 무대에서 내려와 살아가며 느끼는 자신의 진심과의 간극을 더욱 벌어지게 하여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오게 만든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로 죽은 척을 해야 하고, 헨리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 속의 그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퇴로, 안식처는 안이 그를 진심으로 모르겠다고 할 때 열리는 무대의 뒤의 숲이거나 고전 할리우드에서 자주 사용된 스튜디오 촬영기법인 도로 위의 주행 장면과 같은 오직 영화 속 공간들이다.


하지만 그 공간들은 다 허구의 공간들이다. 대부분의 영화들, 특히 뮤지컬처럼 가장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장르에서조차 ‘라라랜드’와 같이 장르와 현실의 괴리가 최대한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데 비해 이 영화는 그 괴리감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다.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가십지의 뉴스들이나 아네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을 최대한 조악하게 표현함으로써 장르가 만들려는 리얼리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관객을 장르적으로 설득하는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2.

병원 안. 간호사들과 의사선생님이 헨리의 무대곡인 ‘웃어요, 웃어요’를 외칠 때 자연스레 조명이 꺼진다. 암흑 속에 아네트가 태어난다. 그녀의 심장에 조악한 핑크색 조명이 점멸을 할 때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내 장면이 바뀌고 그 아네트가 목각인형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 속 그 누구도 아네트를 목각인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헨리가 무대에서 아네트를 소개할 때 ‘이것은 기적’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목각인형이 노래를 하기 때문인지, 목각인형이 날아다니며 노래를 불러서인지, 아니면 진짜 소녀가 무대를 날아서인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도통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뜨겁다. 영화 초반에 영화 속 관중과 영화 밖의 관중을 하나의 외화면으로 잡으면서 일치를 시켰고 그 속에서 헨리와 안이 그들의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면, 아네트가 목각인형으로 나오는 순간에 영화 밖의 관객은 영화 안의 허구성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가 있게 된다. 그 허구성은 영화가 허구라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그것이 허구인지는 알지만 그 허구성을 부정하면서 영화를 본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관객의 자세이다. 이 관객의 자세를 유지하거나 변형시키기 위해 할리우드는 이음매나 장르의 규칙과도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허구성을 대놓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거짓된 형체 하지만 그 누구도 피부로 느낄 수 없는 것- 빛에 반응하며 어둠 속에 태어나는 그것. 세상에 처음 선보일 당시 ‘기적’이라고 말했던 그것.  아네트는 영화인 셈이다. 영화라는 물질에 형체가 없다는 걸 표현하듯 아네트 또한 인간이 아닌 목각인형으로 표현된다. 그녀의 육체성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잡을 수 없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다.  아네트는 스스로 현재 영화의 골격을 해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설적인 선택이 되려 영화 ‘아네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영화 속 아네트뿐 아니라 이 ‘아네트’라는 영화가 다른 영화들보다 빛나는 지점은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애처로운 쇼에서 ‘장르의 필수조건’만은 붙잡기 때문이다. 뮤지컬일 필요가 없는 이 영화의 성격에서 뮤지컬을 고수하는 이유는 영화의 진짜 모습을 통해서 뮤지컬 장르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목소리’만이 가지는 힘을 전달함에 있다. 그 힘은 단순히 ‘음이 담긴 대사(노래)’뿐 아니라 ‘진실’을 동반한다. 레오 카락스가 뮤지컬을 표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3. 

이 성취를 이룰 수 있게 만든 것은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에 있다.

감옥에 갇힌 헨리에게 아네트가 면회를 온다. 헨리가 아네트를 향해 말을 했을 때는 목각인형으로 보였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바라보자 실제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여태까지 우리가 바라본 아네트를 향해 걸어와서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헨리가 오른쪽 눈을 비비자 목각인형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아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내 아이가 면회실에서 떠날 때 그 방에 헨리와 목각인형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태까지 헨리의 시선으로 그 아이를 바라본 것일까?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중간중간에 보았던 가십지의 뉴스라던가, 관객을 영화 안의 존재로 인정하는 듯한 시점의 숏과 움직임들을 통해 영화 안에서 보장받았던 관객의 자리 자체가 역설이 되어 버린다. 영화가 거짓인 줄 알았지만 그 거짓된 곳에서 우리가 보았던 이미지들조차 필터나 특수효과처럼 거짓으로 꾸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우리는 실제 육체를 보지 못하였고, 목각인형만 본 셈이다.  그 목각인형에 현혹되었던 관객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그 진실은 영화 안에서 밝혀지는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진실이 아니라 허구성을 갖는 영화라는 매체의 성질에 대한 진실인[1]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을 마주쳤을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시각으로 만들어진 허구성에서 관객은 진실을 맞이할 수 있는가?

이 두 번의 고백, 또는 거짓으로 인해 아네트는 온전히 이 모든 사건들을 염탐하거나 현혹된 자들로부터 떨어진다. 그리고 아네트가 떠나간 면회실에 헨리와 목각인형,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카메라와 카메라를 바라본 관객들이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영화 내에서 관객을 조롱했던 헨리와 영화를 기괴하게 느꼈을 관객을 같은 곳에 가둔다.  한 명은 진실로부터 멀어진 자이고, 한 명은 진실을 보지 못한 자이다.  즉 둘 다 오만의 대가(代價)인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가 스스로 해체된 영화의 골격을 드러낸 이유가 드러난다. 진실을 알고 있는 영화는 관객과 분리되고 싶어 한다. 레오 카락스는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킹 비더의 작품 ‘군중’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헨리가 육아로 괴로워할 때 나오는 장면(흑백 영상)으로 사용된다. 킹 비더의 ‘군중’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굉장히 기념비적인 무성영화이다. 이 영화의 내용은 굉장히 심플하다.  위대한 1인이 되고 싶었던 사내가 평범한 군중으로 사는 것,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몰락’이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버텨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냐며 위로를 하는데 이 영화가 나올 즈음에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시기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즉 킹 비더의 ‘군중’이 나온 것은 ‘대중영화’와 ‘대중문화’의 관계 그리고 그 일원으로서 기꺼이 표값을 지급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찬가였다. 하지만 레오 카락스는 이 주장에 더 이상 동의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의 군중들은 홀리 모터스의 오프닝 속 죽어 있는 관객들이거나 또는 조롱과 분노, 무지, 상술과 현혹에 기꺼이 참여하는 군중, 그리고 오만한 이들이다.


그 생각은 관객에게 이곳에 있지 말고 나가라고 ‘명령’을 함으로써 더욱 드러난다.

그가 믿었던 영화의 운동이 더 이상 관객과 함께 하지 않을 거라는 기괴한 이혼 사유서를 관객에게 보낸 것이다.


[1] 카메라의 시선으로부터 관객은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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