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은 사과로 미술역사를 바꾸고 나는 사과로 잼을 만들었다.
재작년 우리 집 냉장고는 부우웅 소리를 내다가 고장이 났다. 당시 한가득 사놓은 사과는 모두 꽝꽝 얼어 버렸고 챙겨 놓은 음료수는 차갑지 않았다. 냉장실 안은 위로 갈수록 온도가 높아졌고 냉장고 속 음식들도 어느 층에 있느냐에 따라 꽁꽁 얼거나 상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 모든 물건들을 꺼내고 살펴봤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리공을 불렀지만 밀린 업무에 이틀 뒤에나 올 수 있다고 했고 난 망연자실했다. 미국에서 수리공이 이틀 만에 온다는 것은 쿠팡 로켓배송과도 같은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꽁꽁 얼어버린 사과를 깎아 먹을 수 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기특하게도 사과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늦은 밤, 혼자서 스무 개가 넘는 사과의 껍질을 까고 잘라 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깟 사과가 뭐라고...
하지만, 꽁꽁 얼어있는 사과를 버리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보려는 나는 얼마나 기특한가! 물론 이것이 아줌마의 삶이요 엄마의 삶 아니겠거늘 먹을 수 없던 사과를 홈메이드 잼으로 만들었다는 건 꽤나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깟 사과잼이 폴 세잔의 그림으로 연결되어 글을 쓰게 했으니 사과잼 만들기는 생산적인 노동이자 예술이 일상에 스며드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냥 직업병인데 뭐 이리 거창한가)
폴 세잔의 정물화는 워낙에 유명하지만 특히나 사과 정물화는 세잔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주제였다. 일화에 의하면 친구가 사과가 너무 많다며 세잔에게 잔뜩 갖다 주었고 그 많은 사과를 다 처리할 수가 없어서 그냥 무작정 그리기 시작한 게 사과 정물화라고 한다. (블루베리 가져다줬음 어쩔 뻔)
그는 그 많은 사과들을 여러 모양으로 배치를 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의 사과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의 사과를 그렸다. 전통적인 방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느끼는 대로 그려진 작품에서 중력과 무게 중심과 발란스는 사라졌고, 흥미로운 구도과 모양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공중부양하는 사과, 굴러가는 사과, 막 떨어지기 직전인 사과는 관객들의 눈을 바삐 움직이게 한다. 그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 생동감이 느끼게 한다. 정물화에서 생동감이 느껴질 수 있다니! 아마도 관객들은 그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았을 것이다.
사과뿐만 아니라 폴 세잔은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 산은 늘 그의 곁에 있었지만 작가는 매번 다른 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달라 보였겠지만, 작가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없는 산의 우직함을 기뻐하며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산의 우직함도 작가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졌다.
1880년에 그려진 빅투아르 산이 7년 뒤에 25년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그렸졌는지를 보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산이 있어서 그렸지만, 그가 보고 느끼는 산을 그렸다. 윤곽이 뚜렷한 산을 그리다가 점점 산은 해체되고 산 주변 환경 역시도 붓터치 사이로 스며든다. 너는 산이고 나는 나무고 쟤는 집이야를 알려주던 그림은 이제 산과 나무와 집이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그림이 된다. 점점 무너진 형태는 순수한 세계로 접어들게 한다. 마치 아이가 물감을 뒤죽박죽 칠해놓고 이건 산이야! 볼려고 하지 말고 느끼려고 노력하듯 봐봐! 자 어때? 산이 느껴져? 라고 말이다. 나중에 Paul Cézanne 이 만든 여러 점의 빅투아르 산 작품은 Picasso와 Braque에게 새로운 영감을 되어 큐비즘이라는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큐비즘은 추상화의 증조할아버지 역할을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단순한 방법으로 시작된 작품 시리즈 아닌가.
고작 사과…
동네 산…
Paul Cézanne 이 일상에 주어진 환경 혹은 물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던 것은 그가 평소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들에 대한 감흥을 캔버스로 옮길 수 있던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깟 사과를 그리지 않았다면, 새로울게 없는 동네 산을 그리지 않았다면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큐비즘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작고 하찮은 것이라 여기는 물건들과 환경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것들이 지니는 가치와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다는 것에 일상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작가가 그깟 사과로 동네 산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국 사람을 불러 냉장고를 고쳤고 꽁꽁 얼어서 버려져야 했던 사과는 잼이 되어 몇 개의 병에 담겼다. 몇 병은 지인들에게 생색을 내며 나눠 주었고 온 식구가 한참 먹을 잼은 시원한 냉장고에 놔뒀다.
버려졌어도 되는 사과에게 새 생명을 주고 그 가치와 가능성을 바꾸자 내 삶에 소소한 행복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그깟 사과가 나의 생각과 삶의 깊이를 풍족하게 해 줌을 느낀다.
부우우 우웅~
또 냉장고에서 소리가 난다.
마치 로켓이라도 된듯 달나라로 갈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주인이 소처럼 일하는걸 아는지 냉장고가 그 돈 좀 나눠 쓰자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래도 나는 너를 한 동안 부려먹을 것이다.
네가 죽으면 바로 한국제품으로 갈아치울 테니 버텨라.
살고 싶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