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를 쥔 자가 주인이다.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과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고 있다. 강의 3개를 하루에 몰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고 나머지 날은 병원에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육아와 살림을 하면 금방 월요일이 시작된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버리고 한 달이 금세 지나가 어느새 긴팔을 주섬주섬 찾아 입어야 하는 가을이 와버렸다.
일상은 후다닥 지나가고 아이는 점점 독립적으로 성장하며 내 손을 덜 필요로 하지만 삶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타이어도 갈아야 하고, 점점 크는 아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쇼핑을 하고 교육비를 지불하고, 끼니를 위해 장을 보고, 차에 기름을 넣고, 생활비를 지출하고, 카드빚을 갚으니 통장의 잔고는 늘 아슬아슬하다. 작고 귀여운 나의 월급은 통장에 단 한 번도 정착하지 못한 채 스치듯 사라져 버린다.
인생은 돈인가?
돈이 인생인가?
23살의 총망받는 작가 Rambrandt의 반짝이는 눈 속에는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 묻어있다. 그의 출중한 그림 솜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졌고 작가로서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난 뭘 해도 될 놈이야"식의 매너가 그림 구석구석에 묻어있다.
신기한 일이다. 잘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글거리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보면 "뭘 먹으면 저리 될까?" 싶다. 어린 나이에 이미 유명세를 얻고 많은 것을 이뤄본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여유 같은 건가? 젊은 시절 Rambrandt의 자화상은 유행가사의 노래처럼 앞으로 제일 잘 나가는 작가는 나라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말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밀려드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방을 넓히고 조수들을 고용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30대 중반의 Rambrandt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자화상을 그렸다. 부와 명예가 차곡차곡 쌓이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니 부러울 게 없었을 것이다. 작품이 밀려 들어오니 돈도 밀려 들어왔고 그는 정말 말 그대로 펑펑 썼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돈 쓰는 일 아니겠는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사용하며 고객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턱 하고 안기며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마음껏 누리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인생인가 싶다.
하지만, 그의 명성도 밀려오던 주문도 서서히 끊기기 시작한 건 더 이상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진부하고 오래된 스타일이라 여겼고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한물 지난 작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고객 맞춤형의 작품에서 작가 입맛의 작품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감지한 이들은 Rambrandt와 그의 작품을 작정하고 비난했다. 게다가 작가는 사랑하는 두 아들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픈 개인사를 겪으면서 인생의 바닥을 뚫고 지하로 떨어져 버렸다.
안타깝게도 Rambrandt는 정상에서 굴러 굴러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간 인생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노년의 Rambrandt 의 작품을 찾는 이는 거의 없었고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은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히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마치 내가 글을 쓰며 내 하루를 되돌아보듯이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림으로서 그때 그 당시 품고 있던 생각과 경험을 담아냈다.
잘 나가던 그 시절, 그가 붙잡고 있던 인생의 고삐는 아마도 젊음과 명성과 재능과 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삐가 풀리자 그는 알아버렸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불멸의 진리를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붙들고 살아갈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눈씻고 찾아봐도 그 어디에도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은 영원할 것 같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거나 신을 찾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다.
Rambrandt는 자식을 잃고 아내를 잃고 집을 잃고 명예와 돈과 고객을 잃었지만, 그가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았던 건 그림이었다. 붓을 놓지 않고 매 순간 변하는 자신을 그려 넣으며 자신을 성찰하던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 얼마 전 흔들림 없는 자기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는 작가다.
너희들이 뭐라 하던 나는 작가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세상을 그리고 나를 그리고 신을 그린다.
그의 얼굴에는 평안함이 깃들어 있다. 더 이상 좌절과 싸우지 않기로 한 것 같은 얼굴은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지나 간 시간에 대한 후회도 없이 지금을 맞이한다.
60이 넘은 지금 그가 붙잡고 있는 고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삶은 늘 불안을 동반한다.
그 불안을 잠재우려면 돈이 있어야 할 것 같고 학벌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잘 나가는 차가 있어야 할 것 같고 명품을 휘감아야 할 것 같다. 그뿐인가? 남들이 있다는 모든 걸 나도 소유해야 평화를 얻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면 인생은 더 불안해진다.
작가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이 좌절을 했을까?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많은 굴곡을 견디고 견뎌 60이 되었을 때 세상을 향해 선포했던 그의 얼굴에는 그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내가 누구이며 그 존재의 가치의 소중함을 알면 삶의 고삐는 내가 쥐게 되는 것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선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바쁜 일상을 살아가며 나는 삶의 고삐를 돈에 내어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 삶이 돈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난 그것 위에 올라타 내가 고삐를 쥐고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절제와 베풂으로 욕심과 미련이 슬그머니 찾아오지 않게 하고 있다.
내 삶의 고삐를 단디 쥐고 있는 게 나일 때 행복도 함께 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한다.
욕심과 미련과 불안은 그런 나를 노려보며 호시탐탐 내 삶의 고삐를 쥐려들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