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늘 절망인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언니, 내가 왜 의대를 안 가고 수의대를 간 줄 알아요? 사람 상대하기 싫어서요. 그런데 수의사 되면 동물만 상대하면 되는 줄 알았지 그 주인들 상대를 해야 한다는 건 생각을 못한 거야. 주인들 상대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참 좋아하는 친구는 수의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동물을 살리고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매번 그 주인들 때문에 벅차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새끼 강아지 눈알이 빠졌는데 바로 병원에 데려오기는커녕 그냥 방치했다가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돈 없으니 안락사시켜 달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늘 사람이 문제다.
똥기저귀로 따귀 때리는 짓도
아이스크림을 라인만큼 채워주지 않았다고 쌍욕을 하는 것도
아랫사람에게 갑질하고 윗사람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것도
왕따를 시키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도
공공장소에 칼을 휘두르는 것도
학교에서 총질을 하는 것도
어린아이 성착취하는 것도
동물학대를 하는 것도
다 사람이다.
사람은 얼마나 악한가?
그 악함을 생각하면 도저히 희망이 있을까 싶다.
George Frederic Watts의 유명한 그림 Hope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줄 하나에 귀 기울이며 튕기는 여인을 그렸다. 두 눈은 가려진 체 지구본 위에 앉아 있지만 편안해 보이진 않는다. 편히 기댈 곳도 없는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있다. 허리 한 번 편하게 펴지 못할 공간이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줄 하나가 내는 소리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녀에게 저 하프는 어떤 의미일까?
줄이 끊어지면 쓰레기통에 버려도 마땅한 물건이 되겠지만, 한 줄 남아있는 줄은 악기로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의미이니 쓸모가 없어진 물건은 아직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고운 하모니를 못 낼지라도 그녀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는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그것마저 없어지면 그녀의 세상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그 한 줄의 소리가 지금 그녀에겐 희망이다.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맑은 소리 내는 튕겨줄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악한 사람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든 세상을 다시 정리하고 새롭게 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또 사람이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도 사람이요
아프고 다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으로 품는 것도 사람이요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과 내일이 되는 것도 사람이요
버려진 동물들과 아이들을 구하고 보호하는 것도 사람이다.
궁금해진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을까? 악한 사람이 더 많을까?
눈알 하나가 빠진 체 병원에 온 아기 시츄를 본 내 친구는 주인에게 강아지를 포기하면 수술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했고 눈알 빠진 강아지를 키울 능력도 자신도 없던 그 주인은 흔쾌히 포기 각서를 썼다. 그렇게 수의사 친구는 지금 후크선장이 된 시츄를 반려견으로 키우고 있다.
"언니, 한쪽 눈만 안 보이지 다른 건 다 괜찮아요~ 얼마나 밝고 명랑한지!" 똥꼬 발랄하게 내 친구만 쫓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생각했다. 녀석은 너무 어린 나이에 지옥을 경험했지만 앞으로 죽을 때까지 천국일 테니 안심이 되어 미소가 번진다.
3-4살은 돼 보이는 아이를 업고 구걸을 하던 그 난민 여자가 자꾸 눈에 밟혔고 나는 봉지에 과일과 지폐를 넣은 체 출퇴근할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하루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하루는 너무 비가 와서 하루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4일째 하늘이 너무 맑은 날 난 그녀를 보았고 봉지와 돈을 전해줬다.
선한 사람이 더 많은지 악한 사람이 더 많은지는 나는 모르지만, 나와 내 주변은 늘 옳은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이기도 하다.
세상은 너무 많이 부서졌지만, 그 안에 들어오는 빛은 막을 수 없는 법. 금이 간 사이사이에 빛으로 들어가 희망이 되어주는 건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으니 사람은 또 희망이다.
화초 키우며 때로 사람보다 화초가 훨씬 낫다고 중얼거릴 때도 있겠지만 나는 희망 쪽에 늘 서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