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당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친절한 성품이 몸과 태도에 배어 있는 듯해 보였다. 상냥하게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서 앞니 한 개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그래서 오늘 우리 병원을 찾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를 자리로 안내하고 내 일에 바빠서 정신이 없던 차 누군가가 포스트잇에 메모를 적어 건네준다.
"매니저님, 이 환자 시한부래요. 6개월 남았대요.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선생님 잡아 주세요"
그는 내 앞에 섰고 나는 그를 바라본다. 나는 이리도 떨리는데 그는 평온해 보인다. 어쩌면 그는 병원에 갈 때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한정된 6개월의 시간에 대해 설명했을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와 매번 비슷한 반응을 봐왔기에 감정의 휘몰아침도 점점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진료기록을 보니 앞니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해야 할 치료가 너무 많아 보였다. 그에겐 시간이 별로 없고 치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 보내고 싶진 않으리라.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냥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치료해 줘요. 다른 건 괜찮아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스태프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고 선생님은 눈물을 참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고작 이제 63세.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에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지금 당장 절실한 건 미용목적의 앞니가 아니라 씹을 치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치과 치료는 생사의 문제일까 아니면 존엄의 문제일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죽기 직전까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생존의 최소 수단일까? 아니면 한정된 시간 동안 자신을 제대로 돌보기 위함일까? 아니다. 그에겐 이따위 질문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게 묻고 있다. 그는 살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죽기 위한 선택인지 말이다.
여자로서의 기능과 성적 매력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에 관하여 오랜 시간 퍼포먼스와 사진 작업을 했던 Hannah Wilke는 관객에게 껌을 주고 씹어서 부드러워지면 다시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작가는 부드러워진 껌을 여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만들어 알몸에 덕지덕지 붙였다. 그녀에게 껌은 단물이 빠지면 언제든지 버려지고 새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이 사회에서 여성을 대하는 모습과 별반 다른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발가벗은 체 껌을 온몸에 붙이고 관객 앞에 서있다. 껌이 작가가 되었고 작가는 껌이 된 순간이다.
예술 앞에서 벌거벗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던 그녀도 암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방사선 치료는 그녀의 건강하고 생기 있던 모든 것을 다 앗아갔다. 한때 누드 퍼포먼스를 했던 피부는 칙칙하고 거칠어졌고 그녀의 고았던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다 빠져버렸다. 카리스마로 가득했던 눈빛은 피곤함과 지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겨우 버틸 수 있었을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점점 생명과 멀어지는 자신의 몸을 기록한다. 그녀의 생명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기능이 불가능 한 인간의 상태를 기록하며 작가는 매번 얼마나 절망을 했을까? 생명이 서서히 꺼져감을 기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모두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였다. 그녀는 죽음도 예술적 기능으로 쓰일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말한다. 생기를 잃고 죽음의 그림자가 들어선 작가의 모습은 관객을 먹먹하게 만든다.
죽음이 찾아오는 방법은 생명의 모든 것을 다 앗아간 후에 찾아온다. 조금이라도 생기 있고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모조리 다 집어삼킨 후에 나타난다. 그 과정은 얼마나 추하고 아픈가. 하지만, 작가는 그 죽음 앞에서 어떻게든 당당하게 맞서보려 한다. 그녀의 몸은 예술의 재료였고 죽음은 그녀가 궁극적으로 달려가던 목적지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제대로 살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이 Hannah Wilke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알려주는 지점이다.
나는 그녀를 제대로 살기 위해 죽음을 이용했던 작가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적이자 두려움이었을 죽음을 이용해서 삶을 투영한다.
그녀의 작품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얼마나 처절하게 끝까지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씹어 먹을 만큼의 치료를 원했던 그 환자의 주치의에게 메디컬 클리어랜스 팩스를 보내고 이 분을 맡아줄 의사 선생님께도 자세히 설명과 부탁을 드렸다.
잘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태로 인해 우린 한없이 조심스럽고 경건해지며 더욱 예의를 갖추게 된다. 딱 6개월 동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치료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요할지 몇 번의 방문을 요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매번 살기 위해 그는 방문할 것이고 나와 동료들은 그런 그를 응원할 것이다.
끝까지 잘 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어딘가에 늘 존재하고 있다.
응원받아야 마땅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