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던 적당해야 한다.
누군가는 적절한 우울감이 예술가에게는 꼭 필요한 자극이라고도 했다. 어느 정도의 슬픔과 아픔의 상처를 간직해야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창조적인 연료로 쓰일 수 있다면서 말이다. 인간은 기쁨보다는 슬픔, 즐거움보다는 분노에 더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즐거워서 미쳐 날뛸 것 같던 순간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경험이 더 오래 남기에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작가에게 있어서 모진 추억이나 아픔은 씨앗 같은 역할을 하며 예술 작품의 생명을 싹틔우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곱씹고 되물으며 또 그때의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모습을 훑고 그 당시의 마음을 그리고 지금의 마음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작가의 작품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작가의 초상화이자 작가의 시선이자 작가의 생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우울감을 가지고 "적절한 우울감"이라고 측정할 수 있을까? 정확한 수치와 계산으로 사람의 기분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적절한 감정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겠지만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감정은 매우 사적인 것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선을 모두가 다르기에 "적절한 우울감"이라는 말 자체는 매우 모순적인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적절한 우울감이라는 표현이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우울감"이라는 말이 주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건 "적절하다"라는 표현 때문일 것이다. 우울감이 적당해서 통제와 제어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감정이 내 통제 아래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고도의 노력과 경험으로 축척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그들은 감정이 담긴 컵이 넘쳐흐르지 않도록 적당하게 조절한다.
"지금 이 큰 슬픔을 느끼고 있는 날 달래기 위해 지금부터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할 거야"
"이 지긋지긋한 우울감이 다시 몰려와서 날 묶어 버리기 전에 어서 산책을 나가야겠어"
"난 지금 매우 우울하고 힘들지만, 이제 날 잡아먹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우선 아로마 초를 켜고 라테를 한 잔 마시고 방을 치우는 거야"
Jackson Pollock Number 31, MOMA
뉴욕 모마에 잠시 들려 Jackson Pollock 앞에 서서 작품 감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딸아이는 혀를 끌끌 차며 저건 나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녀석이 좀 더 크면 앞서 썼던 "아니요,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를 읽어줄 것이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몇몇 학생들도 Jackson Pollock의 작품이 도대체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렇게나 붓고 흘리고 튀기고 끼얹은 페인트는 전혀 그 어떤 기술을 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무렇게나 만든 것 같은데 저리도 유명하다니 따위의 생각이 파고들면서 그의 작품을 가볍게 보려 한다.
하지만 정말 그의 작품은 가볍기만 한 걸까?
모든 작가의 작품이 자신의 자화상인 것처럼 그 역시도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을 "기술"적인 부분 즉 화려한 색감에 아름다운 선과 면으로 미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Jackson Pollock은 감정의 필터 없이 조심성도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용기 내어 완성한 작품이다. 예전의 것을 드러내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은 결국 자신의 현재 심리적 상태를 커다란 캔버스 위에다가 퍼부은 것이다. 예상과 계획을 철저히 배제하고 몸과 손이 이끄는 곳 그곳에 내가 있었노라. 내가 느꼈노라 내가 만들었노라!라고 붓이 물감이 말한다.
Autumn Rhythm (Number 30)
그의 작품은 처음과 끝이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도 없고 작품의 중심점 그러니까 focal point가 없다. 이것은 Jackson Pollock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처음과 끝이 없으면 계속 지속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 작품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렬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감정은 늘 무언가와 연결이 되어있다.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 자극을 받으면 예전의 감정과 경험과 기억 모두가 감정의 수면 위로 떠오르며 다시 하나가 돼버린다. 시작과 끝이 없는 감정은 사실 인간만이 지닌 고유의 특징이기도 하다. 난 그것을 정말 집요하고 멋지게 Jackson Pollock이 작품으로 형상화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따로가 아닌 함께 깊이 연결이 되어 엉켜 있다. 그래서 한번 잘못 건드리면 어디서 어떻게 그 매듭을 시작하고 끝을 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Jackson Pollock 여러 레이어 위에 뿌리고, 흘렸듯이 우리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어마어마한 작품을 만들었듯이, 우리도 우리 위에 뿌려지고 엉켜지고 덮혀진 모든 감정과 경험이 우리를 하나의 멋진 작품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 적당한 우울감과 적당한 즐거움과 적당한 슬픔과 적당한 두려움 모두가 우리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위대한 작품이 된다.
누가 뭐라고 지랄을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