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추억과 서도호
담고 싶은 기억이 별로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다. 정말 별로여서 기억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일부러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처럼 주변에 좋은 선생님이나 이웃 혹은 사이좋은 부모는 현실에 없었다.
비록 좋은 추억과 경험이 많은 유년시절을 한국에서 살진 않았지만, 외국에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한국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열함은 여러 감각으로 나를 자극했다. 물론 그걸 우린 향수라 부른다. 한 겨울 종이컵에 담아주던 포장마차 어묵, 따뜻한 국물의 맛, 비가 막 내리면 나는 비릿한 향은 시장 골목을 생각나게 했고 장마철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생각하게 하였다.
신기하게도 추억이란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몸의 여러 감각이 느낀 크고 작은 여러 자극을 통해 상기시킨다. 너에게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와 함께 이런 시간을 보냈었다고 말이다. 시장 상인과 가격흥정에 주거니 받거니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 밤에 들었던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비가 펑펑 쏟아지는 날 밤 비를 맞고 걸었던 어느 날... 병원 기계소리와 소독약 냄새, 낙엽소리, 작업실에서 울려 퍼지던 Miles Davis 달리는 차에서 불렀던 마왕의 노래 같이 모든 감각이 내 인생에서 이런 순간이 있었다고 말해준다.
이상하게도 어떤 추억은 늘 한 부분만 재생이 된다. 앞뒤 다 잘라먹고 어느 한순간만 생각이 난다. 물론 강렬했던 기억은 작은 디테일마저 다 기억하게 만든다. 숨소리, 눈길, 그때의 공기 온도,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향이 났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냥 찰나의 아찔한 기억이 감각을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그때 그 순간 느꼈던 감정과 자극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처럼, 하나의 덩어리처럼 남겨질 뿐이다.
서도호의 Rubbing and Loving을 놓고 강의를 하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들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정말 기가 막힌 제목을 지었다.)
작업실과 침실의 구분이 애매한 작은 방에 살던 학생 서도호가 수도 없이 만졌을 문고리, 냉장고, 스토브, 싱크대, 벽을 몇 년 뒤에 한 뼘 성장한 성인으로 또 작가로서 다시 마주 했을 때 느꼈던 감동은 어떤 걸까? (히터에 꽃 디자인이 있었다는 걸 그는 언제나 알고 있었을까!)
길 잃은 것처럼 도저히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뇌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 망설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루키의 시절을 보냈던 그 장소에서 그가 느꼈던 그 아릿한 추억, 찰나의 추억은 너무 소중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작가 서도호는 그가 살던 작은 아파트의 모든 공간을 종이로 붙이고 크래용을 가지고 문지른다. 종이는 크래용이 움직이는 대로 흔적을 담는다. 무늬, 패턴, 스크래치처럼 오랜 시간 사용하며 만들어진 자국과 흔적이 종이에 담긴다. 때로는 작가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 마저 종이에 담긴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는 종이로 옮겨간다. 작가는 말한다. Rubbing 즉 문지르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라고 말이다. 다시 한번, 정말 끝내주는 제목이라 느낀다.
문지르는 혹은 만지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만지고 사랑하는 것은 일상의 물건을 넘어서 연인과 자식과 부모와 친구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온기가 아닐까? 한없이 문지르고 만지고 싶은 추억과 공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건 그때보다 더 성장한 나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니까. 그때보다 못한 나라면 아니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추억의 공간은 후회로 채워져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평범한 라이트 스위치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예술의 힘이듯, 작가 서도호는 자신의 개인적 공간도 누군가에게 추억이라는 의미로 다가갈 수 있도록 양보해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를 매우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힘... 난 그것이 작가 서도호의 가장 큰 매력이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