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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Jan 02. 2024

새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인생은 때때로 한없이 간절하고 절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긴장이 풀리는 시기를 노리던 감기는 이때다 싶어 나를 공격한다. 한없이 무방비 상태인 나에게 온갖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감기 바이러스를 이길 재간이 없었고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너무 쉽게 나가떨어졌다. 감기로 끙끙 앓다가 배탈이 났고 배탈이 다 나을때즘 빨래 바구니를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2023년의 마지막 주 나는 휠체어와 응급실 방문, 근육이완제와 진통제, 감기약과 소화제와 아연 영양제, 카이로프렉틱과 침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한 해의 마무리를 끝내주게 마무리 하자 새해 응급실 방문 병원비가 나를 반긴다. 젠장할! 


그렇다고 모든 게 엉망인 건 아니었다.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던 허리도 점점 나아졌고 보고 싶던 가족과 친구들도 만났다. 우린 매해 점점 줄어드는 체력과 나이의 상관관계를 논하다가 후달리는 체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자식새끼의 크고 작은 사춘기 반항을 이야기한다. 한숨으로 공감하다가도 맛깔나고 냉소적인 농담을 심각한 대화 사이에 끼워 넣어 깔깔 웃을 수 있는 웃음 포인트도 잊지 않았다.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게 또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순간들이다. 


James Webb, Prayer,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18년 칼바람을 뚫고 시카고 미술관에서 열린 James Webb의 기도 작품을 감상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웅얼거리는 소리로 여러 개의 스피커에서 동시에 들리고 방안은 소음으로 가득 찬다. 하지만, 그 소음은 자동차 경적소리도 고성이 오고 가는 싸움소리가 아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신에게 간절하게 읊조리는 기도였다.  여러 다양한 종교와 그들의 기도를 소리로 담아 작품으로 만든 작가는 이 전시실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신발을 벗고 감상하게 하였다. 마치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난 하나님이 이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한 것과 같은 그런 "신성함"이 작품에 담겨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야 했던 그 방에서 나는 스피커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무엇이 이리도 간절한가?"


평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온 내게 다른 언어로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종교의 신에게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듣는 경험은 매우 "영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왜 이리 절실하게 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일까?" 

그 질문은 즉 인간은 얼마나 영적인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현재의 시간을 넘나드는 더 큰 세계, 죽음에 대한 불안,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확실함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다.  불안은 인간을 얼마나 영적인 존재로 만드는가?


 Egon Schiele, Woodland Prayer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Egon Schiele에게도 그 영적인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영역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품이 Woodland Prayer다.  성적으로 타락하고 어린아이를 성적인 대상으로 농락하고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는 하필 기독교 성화들이 가득 놓인 한 장소를 그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있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 최후의 만찬의 장면과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마치 성화를 한 곳에 모아놓은 정크야드처럼 보이는 저 장소는 분명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어 보인다. 아는 사람만 찾아와 절실히 기도를 하고 돌아갔을지도 모를 저 장소에서 무슨 기도를 신께 드렸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Egon Schiele에게는 이 그림이 자신의 불안을 쏟아부으며 만든 성화일지도 모를 일이다. 


Albrecht Dürer, Praying Hands

기독교인들에게 특히나 유명한 기도하는 손은 Albrecht Dürer의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려면 이 정도는 해야 장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작가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의 기도하는 손만큼은 기교보다는 의미에 더 큰 중점을 둔 작품이다. 비싼 보석을 끼지도 않았고 실크와 벨벳으로 치장을 한 옷을 입고 있지도 않다.  그저 두 손을 포개 기도하는 손을 그린 작가는 겸손하게 신과 대화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그 겸손함 속에 응답하는 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니... 



 

기도라는 것은 매우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라는 행위는 종종 불안을 덜어내기 위한 방법이다.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파도를 맞딱 드렸을 때 그 파도에 휩쓸려 죽지 않게 해 달는 간절함을 표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달래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 보면 기도가 매우 절절하고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새해 첫날, 해가 뜨는 모습을 지켜본 가족에게 뉴스 앵커가 소감을 묻자 "세상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그를 향해 나는 냉소한 말투로 말했다. 

"모두가 행복? 그럴 수가... 없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렇다.  세상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건 허구다.


2024년은 어떤 해가 될까? 

삶은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쉽지 않았고 아무리 파이팅을 외쳐도 나가떨어질 일이 꼭 있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잘 안 되거나 엎어질 수 도 있을 것이고,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져야 하는 일도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월급은 오르지 않지만 물가는 계속 오를 것이다.  그런 와중에 꼭 내 성질머리를 건드리며 눈치 없는 구는 인간은 작년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있을 예정이다. 녹록지 않을 것이고 치열하게 싸울 것이고 열정적으로 살다가도 감기 한 방에, 누군가의 상처되는 말 한마디에 처절하게 나가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에게, 당신의 신에게 혹은 당신에게 읇조릴 그 기도가 숨구멍이 되어 우릴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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