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이 목마를 때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부탁하는 예수님의 장면. 그리고 그 여자는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언자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 여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반응하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그 우물가의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단 한 명의 경험이 마을의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들이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 드리는 데 있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확인했기 때문이지만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궁금해하고 찾으러 나선 것은 그 여자의 힘이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이도 남편이 아닌 사마리아의 여인의 삶은 평탄치 않았을 것이고 그런 그녀의 사생활을 향해 사람들은 분명 등 뒤에서 수많은 소문들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창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당시 여자는 이혼을 원할 수 있던 위치도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다섯 남편과 동거남은 모두 그녀에게 이혼과 청혼을 요구했던 남자들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버림받는 게 일상처럼 굳어진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여자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한 정도의 취급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던 여자의 의견과 생각에는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안 하던 유대인이 그것도 구원자가 고통의 삶을 지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던 그 순간 여자는 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화를 지속한다. 그 대화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에게 그 간절함이 있었구나.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즉 삶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 탄탄한 믿음이 너무나 간절했구나... 유대인에다가 낯선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이런 대화를 지속할 수 있던 것은 그녀의 간절함이 자신의 신분과 처지보다 즉 그녀의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 보다 더 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간절함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간절하게 구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던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에 대한 초점보다는 우리의 태도와 동기를 더 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의 욕심인지 아닌지 어리석은 욕망인지 아닌지를 뼛속까지 꿰뚫고 계신 분은 목적보다는 동기와 태도를 더 중시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가슴속의 응어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그 무엇을 경험하게 된다.
수근덕 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조차 드는 게 힘들었을지도 모르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물동이까지 놔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예언자를 만났다고 흥분하며 떠들었다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었을게다.
이 여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혹은 이 여자가 이럴 정도면 진짜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반응을 했고 예수를 찾아 나서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삶을 맡겼다.
한 사람의 간절함이 여러 사람들 반응하게 만들었다.
나의 간절함은 무엇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하게 하고 있는가? 아주 작은 불씨라도 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