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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May 07. 2024

성장과 고통과 경직과 말랑젤리

Egon Schiele의 신생아


무조건 부딪혀보고 경험해 보는 것에서 삶의 지혜를 얻었다. 나는 책으로 지식을 얻었지만, 실생활에서는 내 오감이 경험하는 것에 더 큰 배움을 얻었던 것 같다.  책으로 돈에 대해서 공부해 봐도 막상 주식으로 돈을 잃어보니 얻는 교훈이 있었다. 책으로 얻은 가르침의 방법보다 수많은 학생들과 부딪히며 얻은 노하우가 내 강의의 방향성을 바꿨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책을 읽어봐도 막상 그들과의 관계는 책을 넘어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육아는 도저히 책으로 커버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아주 일찍 알았다. 부딪혀보고 나가떨어져보고 절절한 사랑과 이별을 하고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까지 떨어져 보면서 "닥치면 한다"는 인생의 모토는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감으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확신이 있다. 기억과 경험 또 그때의 감정이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경험들이 굳은살을 만들어내고 잔근육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너무 힘들었던 문제가 나이를 먹을수록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건 그 굳은살과 잔근육으로 인해서다. 그 굳은살과 잔근육은 삶의 우선순위는 바꿔버리고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을 바꿔버린다.


어릴 적 나는 성장통으로 인해 발목이 유난히 많이 아팠다. 그 발목의 통증은 누군가가 날카로운 톱으로 내 발목을 잡고 쓱쓱 쓸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제대로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툭하면 발목이 아프다고 울먹였던 나는 고통을 꾹꾹 참으며 버텼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으니까.  내 딸아이도 아기시절 성장통을 많이 앓았다.  사실 나는 엄마가 돼서야 아기도 성장통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신생아에서 영아로 영아에서 유아로 또 유아에서 소아로 진행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아이는 매번 성장통을 경험했다.  아이는 매번 울었고 짜증을 냈고 귀를 집어 뜯어 피를 냈다. 생명체가 크기 위해선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생명은 크기 위해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이 없는 성장은 없다. 


                    

Egon Schiele , New Born Baby


Egon Schiele의 아기 그림은 내 아이가 느꼈던 그 성장통을 그대로 표현한 것처럼 생생하다. 이제 막 갓 태어나 코로 숨을 쉬기 시작한 아기는 무엇이 이리도 괴로운지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운다. 낯선 환경에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상태로 태어났기에 울부짖는 목소리 말고는 그 두려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태어난 순간 마주하는 두려움과 낯설움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찌푸린 표정과 각이진 어깨에서 기계적인 느낌마저 주는 건 왜일까? 

아기가 느끼는 불안의 울부짖음이 온몸을 경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관절 하나하나 마디 하나하나가 온통 딱딱하게만 느껴진다. 사람의 몸에는 직선이 없이 온통 곡선뿐인데 왜 작가는 이리도 경직되게 아이를 그렸을까? 성장은 고통을 유발하고 그 고통이 우릴 경직시킴을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꽃게가 탈피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그 딱딱한 꽃게가 탈피를 하자 온몸이 흐물흐물하다. 딱딱해야 할 등껍질도 다리도 말랑한 젤리처럼 흐물한 모습이 낯설다. 꽃게에게 성장이란 어쩌면 유연성과 부드러움과 취약한 상태로 버티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정도 지나면 꽃게는 다시 단단해지고 탈피를 앞둔 시기에는 다시 취약하게 부드러운 몸을 지니기를 반복할 것이다. 


Egon Schiele, New Born Baby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고통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고통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한 뼘 성장하기 위해 한 뼘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이라면, 운명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마다 꽃게처럼 유연하게 말랑말랑하게 그 고통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무슨 연체동물도 아니고 갑각류도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는 드러난다. 


고통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암탉이 알을 품듯 고통을 품어버리는 이들이 있고 

고통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라 여기며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려는 이들이 있고

고통을 잊기 위해 내 육체에 정신에 음식으로 약물로 쇼핑으로 억누르는 이들도 있고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평안과 안정을 빼앗으려는 이들이 있다. 


나는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것들을 감당하는가? 

내 성장의 깊이와 넓이는 내가 어떻게 고통을 감당하는가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음을 알 때 삶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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