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깟것들이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
이틀 연속 새벽 1시 반 두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학생들에게는 학기 끝 방학 시작이지만 나는 파이널 점수를 다 낼 때까지는 방학이 아니니까.
대충 읽을만한 에세이들이 아니었기에 정말 열심히 읽고 답을 했다. 학생들은 한 페이지 짜리 에세이를 3-4장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눈다. 그중 한 명이 Marina Abramovic의 리듬 0이라는 퍼포먼스를 가지고 글을 썼다. Marina Abramovic의 퍼포먼스를 마지막 강의때 하는 이유는 개념미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해서인데 사실 그 퍼포먼스를 연결해서 인종 차별, 왕따 같은 관계의 문제를 가지고 작품을 한 작가들을 모아서 주제 강의를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작가는 테이블 위에 70여 개의 일상 생활의 물건을 올려놨다. 밤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관객들은 작가에 가하고 싶은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 자신은 나무처럼 서있기만 할 것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당황한다.
나무처럼 서있겠다고?
관객들은 테이블 위에 있던 음식들을 작가에게 먹이기도 하고 말을 걸어보지만 작가는 정말 나무처럼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작가의 옷을 벗기는 이들이 있었고 거칠게 가위로 자르는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몸을 만지고 낄낄 거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녀의 몸을 옮기고 눕히고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래도 반응 없는 통나무 같은 그녀의 몸에 칼로 긋기 시작하자 그녀는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피 흘리는 그녀를 본 관객들은 히히 거리다가 그녀의 상처에 혀를 날름 거리며 피를 핥기까지 한다. 관객에게 작가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이 없는 물건이었다. 함부로 대해도 되고 막 다뤄도 되는 소중하지 않은 물건. 시간은 점점 가고 그녀에게는 점점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정말 죽을 수 도 있겠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녀는 테이블에 총 한 자루와 총알 한 알을 놔뒀고 관객 중 한 명은 그녀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당기는 시늉을 한다. 작가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지만 사람들은 이 순간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녀는 새벽 2시가 되자 퍼포먼스를 끝내고 관객들에게 걸어갔다. 순간 관객들은 뒷걸음질을 친다. 작가가 움직이자 그녀가 나무가 아님을 물건이 아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녀가 사람이라는 걸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생김새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던 나의 학생은 Maria Abramovic의 이 퍼포먼스를 잊을 수가 없을 거라 했다. 자신이 그렇게 물건처럼 나무처럼 생명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뤘기 때문이라 했다. 아무도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을 때 느꼈을 외로움과 절망감 수치스러움은 학생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상처가 되었기에 작가의 그 두려움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물건처럼 여겨졌을 때의 끝은 늘 죽음이었음을 역사가 뉴스가 사건사고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냥 죽음이 아닌 동물보다도 못한 죽음이다. 너무나 잔혹하고 피를 낭자하는 죽음이다.
Marina Abramovic 은 목숨을 걸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이 인간을 향해 넌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할 때 행해지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그녀는 6시간 동안 보여준 것이다.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손에 총을 쥐어주며 낄낄 웃어가며 너 스스로를 죽이라고 종용할 수 있는 게 인간임을 말이다.
왕따를 당했던 내 학생은 참 용기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가 한때 왕따를 당해서 이렇게 가슴에 큰 생채기를 안고 삽니다라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쉽게 낼 수 용기는 아니지 않은가? 난 학생이 그걸 알길 바랐다. 스스로가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지 말이다.
그녀에게 나는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고작 시간 강사 주제에... 하지만 고작 시간 강사에게 이런 용기를 내어준 그 친구에게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는 만지면 아픈데 흉터는 더 이상 아프진 않지만 머리는 기억을 하지. 어디서 어떻게 얻은 상처였는지 그때 얼마나 아팠는지 말이야. 지금 네가 지니고 있는 아픔이 상처인지 흉터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 아픔이 네가 앞서 나가는 데 있어서 올무처럼 작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Marina Abramovic이 움직였을 때 사람들이 뒷걸음친 것처럼 너도 그렀으면 좋겠어. 살아있다고 죽지 않았다고 나도 사람이라고 난 강하다고 보여주면 네 인생에서 너는 앞만 걷고 그들은 뒷걸음을 칠 거야.
허접한 글을 남겨줄 수 있는 게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위로였지만 사실 그건 나를 향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 따돌림을 경험해 본 유학시절에 나를 움직이고 기능할 수 있게 해 준 건 분노가 8할이었다.
이 병신 새끼들 내가 너네들한테 보여주겠어! 따위의 분노 말이다.
하지만,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 나를 지탱하는 건 분노의 8할이 아닌 내가 삐둘어지지 않고 바르게 잘 자랐다는 자부심이다. 상처가 흉터로 변했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건 다 나아서다.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경험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학생의 인생의 8할이 분노일지 수치심일지 슬픔일지 모르겠으나 그가 마흔이 넘어 부모가 되고 직장을 가지고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는 8할이 그럼에도 나는 잘 버텼고 이겨냈고 이 만큼 왔다는 자부심이길.....
여름 방학의 시작, 상처에서 흉터로 변하는 시기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