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끈으로 국수를 만들 순 없잖아?
마가복음 8장을 읽다가 문득 스쳐가는 생각 하나. 왜 예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빵과 물고기가 필요했나였다. 예수가 40일을 굶었을 때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유혹을 했다.
"충분히 그만한 능력이 있지 않아? 돌을 빵으로 만들어! 배고프잖아~"
하지만 그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며 그것을 거부한다.
군중이 배가 고프다고 할 때 그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배부르게 먹게 하였다. 하지만, 꼭 빵과 물고기만 가능했던 것일까? 신발, 모래, 자갈 등등으로도 가능한 거 아니었을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면 자신의 피조물을 식용 가능한 무언가로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마술처럼 뿅~ 하자 케이크가 되고 떡이 되고 빵이 된다면 굳이 빵과 물고기가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 우습게도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속담은 사실 경험이 쌓이고 익숙해질 때 더욱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된다는 의미이다. 친근하고 익숙한 일이 차곡차곡 쌓여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몸과 정신은 안정적이지 않는가?
그렇듯이 예수도 그랬던 게 아닐까?
갑자기 신발 가죽끈으로 국수를 만들었다거나 자갈로 수제비를 만들고 모래로 죽을 쒀 만들었다면 쉽게 사람들이 우와~ 맛있겠다~ 하면서 먹을 수 있었을까? 군중은 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겠지만 쉽게 그 음식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을게다. 그건 평소 먹던 음식의 재료가 될 수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군중은 가죽끈이나 자갈 혹은 모래가 음식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지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군중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기적을 베풀었다. 돌과 신발끈 대신 빵과 생선을 선택하여 기적을 배품으로서 군중들이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그건 사실 예수가 우리의 눈높이와 인지능력 안에서 행할 수 있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기적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 있도록 말이다.
살아가면서 기적을 바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기에 내 소원도 충분히 들어주실 수 있으시지 않은가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내가 바라는 기적이 나의 눈높이와 인지능력에서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걸 이뤄주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어떤 이익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라는 변화 혹은 기적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부분 개인을 위함이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적과 변화가 예수가 삼은 기준 아니었을까? 그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눈높이 교육이 얼마나 잘 먹히는가.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시고 계신지 종종 기도와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다. 딱 우리 수준에서 이해가 쏙쏙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