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믿음이 개독을 만든다.
새 차를 구입한 그녀는 다짜고짜 차를 몰고 교회 담임 목사를 찾아왔다. 그리고 목사에게 부탁을 한다.
목사님, 나 차 사고 나지 말라고 기도 좀 해주세요. 이 차 위엔 손 딱 놓고 안수기도 하시면 제가 사고 나지 않을 겁니다.
목사는 그녀에게 차에게 안수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목사가 성도를 위해 기도를 해줘야지 거부해? 그녀는 그런 목사에게 큰 실망을 했다.
돼지 머리에 고사를 지내고 굿을 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설명을 했지만, 그녀는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내가 직접 타고 운전하고 다닐 이 차를 축복하지 않는 목사가 괘씸할 뿐이다.
비록 안수기도를 받지 못한 차를 몰아야 했지만, 그녀는 교통사고 한 번 나지 않고 그 차를 잘 타고 다녔고 목사에 대한 실망감도 곧 사라졌다. 행여 교통사고라도 났더라면 그때 안수기도 제대로 빡세게 해주지 않았던 목사를 얼마나 원망했겠나.
대한민국에 기독교 역사가 뿌리내린 지 200년이라고 하는데 그 짧은 역사의 종교를 5대째 믿고 있는 집안 출신이 나다. 나의 조상들은 일찍이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그 믿음을 자손 대대로 전하는데 힘쓰셨던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평생 제사 혹은 돼지 머리에 고사드리는 모습 혹은 굿하는 모습을 드라마와 영화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은 늘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에는 예배가 있었고 친인척 누군가는 목사였다. (그래서 더욱 나는 목사와 결혼하는 걸 싫어했던 것 같다) 아무리 술에 절어 있어도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를 잡아먹어도 늘 성경을 읽는 증조할머니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5대째 믿는 집안의 모습이었다.
교회를 가는 게 당연한 것이었던 환경에서 자라 미국에 유학을 오자 들었던 의문은 왜 나는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나? 였다. 게다가 이민교회의 특성상 교회는 그리운 내 고향 커뮤니티 센터가 되어있었고 그들이 믿는 종교와 행동, 태도의 괴리가 너무 컸기에 나는 한동안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등을 돌렸다. 왜 개독으로 불리는지 목사를 봐도 성도를 봐도 심지어 나를 봐도 알겠는데 어찌 신과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난 단 한 번도 신을 부정하거나 거부한 적 없었지만, 그를 믿는 이들은 매번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나의 삐뚤어진 신앙과 마음을 바로잡게 해 준 건 당시 신학생이었던 남편이었다. (그래서 나를 목사랑 결혼시키신 건가요! 하나님!) 그가 말하는 하나님, 그가 배우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의 정의는 내가 경험한 기독교, 한인 이민 교회와 그들이 가르쳤던 하나님과는 결이 달랐다. 그리고 그제야 내 믿음의 뿌리가 한국의 문화와 정서, 역사와 미신적인 사상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신앙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경험하는 기독교는 매우 한국스러웠다는 게 가장 정확한 표현 같다. 전 우주를 아우르는 신의 능력이 딱 대한민국에서 딱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었다. 나만을 위한 요술램프의 지니같이.
기독교는 이천 년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종교인적이 없었다. 예수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 그의 곁에 와서 쉼을 얻으라 했지 그 짐 진 자들의 짐을 요술봉으로 싹~ 없애준다고 한 적이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지나 우리가 순금같이 가치 있어지리라 했지 골드바를 손안에 쥐어준다고 한 적 없다. 처음은 미약하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 관여하여 끝까지 함께 창대하리라고 하셨지 당신의 치킨집 사업이 번창해서 2호점 3호점까지 나올 거라는 예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내 삶에서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게끔 함께 하겠다는 의미지 직장도 봉급도 배우자도 아파트 분양도 로또 당첨도 다 구하고 두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마치 무당을 만나 앞으로 내 미래의 일을 점쳐 달라는 듯 교회를 찾고 목사를 찾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한다. 그러면 그런 믿음에 발맞춰 주시옵소서를 외치는 목사가 있다.
예배당을 주시 옵소서
건축 헌금 1억 채워 주시옵소서
성도 1000명 믿습니다!
이 교회서 무사히 은퇴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보통 혼자 하겠지만)
김 아무개 목사 교회보다 내 교회가 더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도 혼자 하겠지만)
알라딘의 요술 램프랑 하나님이랑 동급이 되는 순간이다.
도대체 기독교는 그럼 어떤 종교인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도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으니 내가 가는 길 그분이 함께 하시니 힘들어도 버틸만하고 버티다가도 넘어지면 또 위로도 받으며 힘이 나면 또 힘든 인생을 내가 믿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거다. 그러면서 내 주변에 나와 함께 그 힘든 인생을 나누는 이들을 사랑하며 아끼며 돕고 때로는 부대끼며 다투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하려 힘쓰고 애쓰며 함께 가는 것. 그게 기독교다.
언젠가 휴가 중에 호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훑고 있을 때다.
어떤 미국인 목사는 매우 고급져 보이는 양복을 입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설교를 했다.
여러분이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당신의 신용카드 빚의 숫자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애 버릴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게 안되면 당신은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우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웃기 시작했다.
우리 카드빚 그렇게 간단하게 없앨 수 있는 거였어?
우리 둘 다 믿음이 너무 없는 거 아냐?
남편과 나는 그 설교를 듣고 기가 막혀 웃다가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디서 저따위 설교가 주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생방으로 방송이 되는 거지?
하나님을 요술램프의 지니 정도로 취급하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말씀이 싸구려가 되고 믿음이 싸구려가 되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는 거다.
내가 믿고 따르는 말씀이 그리고 내 삶의 태도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지금 기독교인지 개독교인지 점검을 해봐야 할 때다. 요술램프의 지니 정도의 하나님은 교회가 아니라 디즈니에 더 잘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