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 is a person no matter how small
언제부턴가 아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그 어떤 일보다 싫은 나에게 딸아이의 꿈은 낯설기만 하다. 아이가 좀 더 크면 그 꿈은 또 다른 꿈으로 대체되겠지만, 지금은 배우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대체될 꿈 치고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아이는 자신의 꿈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
아이는 언제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우리를 따라 연극과 뮤지컬을 보러 다녔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책을 읽으면서 거기서 나오는 매력적인 캐릭터에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상상 속 그 캐릭터가 되어 온갖 멋진 모험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배우의 꿈을 꾸게 하는지도 모른다.
나이에 비해 꽤 구체적으로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신기했다. 나는 네 나이 때 아무 생각이 없던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우리 부부는 아이가 꾸는 꿈을 조금이라도 경험했음 하는 마음에 여름방학 캠프에 등록을 했다.
작년에는 인어공주 뮤지컬에 도전하고 한 줄 대사를 읊었다. 인어공주의 여섯 자매 중 한 명이었다. 그 한 줄의 대사에도 아이는 너무 행복해했다. 무대 위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아이는 정말 그 순간을 즐기고 있음이 느껴졌다. 게다가 친한 친구들마저 와서 아이를 봐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올해 아이는 작년보다 규모가 훨씬 큰 뮤지컬에 도전을 했다. 동네 극단에서 올여름 Finding Nemo 뮤지컬 단원을 모집했고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오디션을 보러 갔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으며 오디션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한다.
내가 다 떨렸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먼저 직장으로 출근하는 나를 살랑이는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쓰고 뮤지컬의 한 부분을 노래하며 날 배웅한다. 아이는 이미 Dory가 되어 있었고 Nemo가 되어 있었다. 남편과 아이는 시간이 되자 오디션장에 들어섰고 남편은 직장에 있는 내게 오디션을 기다리는 아이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아이 옆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큰 언니 오빠들 사이에 있었고 아이는 떨리는데 너무 설레어하는 표정이다.
오디션이 끝나고 아이는 더욱 흥분이 되어 있었다.
"엄마! 나 노래랑 연기 잘한다고 감독이 칭찬해 줬어. 꽤 큰 배역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아. 엄마가 생각할 때 난 Dory가 잘 어울려 아님 Nemo가 잘 어울려?"
내가 따라가기에 벅찰 만큼 아이의 마음은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이 약간 불안했던 건 아이가 원하는 만큼의 배역을 맡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말했다. 뒤에서 살랑이는 미역이 될 수 도 있고 아무 대사가 없는 물고기 일 수 도 있다고 말이다. 우리 역시 아이가 꼭 비중 있는 배역을 얻길 간절히 원했지만, 쟁쟁한 아이들이 몰린 오디션에서 녀석이 배정받는 역할은 매우 작고 비중이 작을 수 도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디션 결과 발표날, 나와 딸아이는 함께 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이메일로 온 결과에서 아이는 아무 대사가 없는 물고기 친구 3이었다. 아이는 한참 말이 없이 결과가 나온 PDF 파일을 또 보고 또 본다.
"괜찮아?"
"어 괜찮아"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하다. 이런 내 아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더 연습해서 다음에 또 도전하자고 해야 할까?
너의 재능을 못 알아본 스태프들을 탓해야 할까?
작은 역에도 최선을 다하면 또 다른 좋은 역이 온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배우는 특히나 오디션을 계속 보면서 해야 하는 직업이라 네가 실망하는 순간도 많이 올 거야. 하지만, 너는 무얼 맡아도 잘할 거니까 그리고 점점 더 잘할 거니까 괜찮아"
온갖 생각과 감정이 밀물 썰물처럼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을 아이의 머릿속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페인팅에 다시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진짜 연기 되게 잘하는 물고기 친구 할 거야. 내가 그 물고기 친구들 중에서 최고일 거야. 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연기할 거거든. Dr. Seuss 공연 삼촌 따라갔을 때 말이야. 그때 거기 대사가 이런 대사가 있었어. a person is a person no matter how small. 내가 생각해 보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맡은 게 매우 작은 물고기 친구들이어도 나는 매우 중요한 물고기야. 뮤지컬에서 나는 꼭 있어야 하는 물고기 친구들일 거야. 나 괜찮아 엄마. 실망하지 않았어"
아이가 실망을 대하는 그 자세와 태도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과 감사가 샘솟는다.
그래.. 네가 이런 생각과 태도로 인생을 산다면, 너는 무얼 하든지 꽉 찬 삶을 살 것이다!
오디션 발표 다음날부터 아이는 한 달간 뮤지컬 연습에 들어간다. 발성과 노래와 춤과 연기 모두 배울 수 있는 이 소중한 순간 물고기 친구를 맡은 아이에게 말했다.
"가서 가장 멋진 물고기 친구 연기를 하고 와! 엄마 아빠는 네가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아이는 엉덩이를 흔들며 물고기 흉내를 뽀끔뽀끔 거린다.
귀여운 녀석을 안아주고 나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첫 뮤지컬 연습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엄마! 나 물고기 친구 아니래! 나 거북이래! 나 솔로로 노래하는 파트도 있어! 그것도 5개나 있어!"
아이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알고 보니 배역을 배정표에 아이 이름이 잘못 올라갔다며 극단 쪽에서 먼저 남편에게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아이의 기쁨은 곧 내 하루를 꽉 채웠다.
물고기 친구를 했어도 거북이를 해도 더 비중이 큰 니모와 도리를 했어도 너는 너답게 최선을 다해 즐기며 기뻐했을 것이다. 아무리 작아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대사처럼 세상에도 연극에도 너무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뮤지컬 연습 2주 차 아이는 거북이가 입어야 할 무대의상을 봤다.
아이는 오히려 물고기 친구를 맡았을 때보다 더 깊은 실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엄마, 내 무대의상 진짜 최악이야. 너무너무너무 못나보여."
"다 가질 순 없어. 배역에 충실해야 하는 게 배우의 삶이거든"
"그래도 너무너무너무 구려"
"연기로 승부해"
"엄마, 비니를 써야 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이라 진짜 오이 같아 보여"
"거북이가 바나나일 순 없잖아."
"엄마, 나 너무 못나 보일 텐데.... 친구들한테 미리 얘기해 놔야겠어."
아이는 무대의상의 실망만큼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우리에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