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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Aug 01. 2024

아픔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난 글을 쓴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시작하고 싶었던 월요일이었다. 좋아하는 재즈를 틀고 여유 좀 부리면서 느긋하게 말이다. 하지만, 내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은 나의 여유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하였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입술은 이빨자국이 난 채로 다 터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우리 병원에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러 오는 그녀는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웬만큼 소통이 가능한 동유럽 쪽 사람이다.  그녀가 입을 열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앞니는 부러져있고 그 옆 치아는 뒤 털어져 잇몸 밖을 향하고 있었고 입 안쪽과 입술은 온통 이빨자국과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녀는 내게 큰 봉투를 보여주며 응급실에서 퇴원하고 바로 우리 병원을 찾은 거라 했다. 응급실에 받은 봉투에는 그녀에게 처방된 약 종류와 응급처치를 한 기록이었다. 나는 그녀가 넘어져서 이가 부러졌다고 생각하던 차 그녀가 말했다. 


"오늘 새벽 아들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어요. 얼마나 무섭고 아팠는지..... 경찰이 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응급실에서 조치를 받고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왔어요.  지금 당장 선생님을 볼 수 있을까요?"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걸까? 

너무 담담하게 아들에게 주먹질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그녀에게 너무 놀란 표정도 당황한 표정도 짓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 초라하게 작게 만들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기에 이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다. 어떤 표정과 말투로 나는 그녀를 응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그녀는 말했다. 


"아들이 마약에 많이 취해 있는 상태였어요.  몸을 가눌 수도 이성적으로 판단도 할 수 없었죠."


아......

저 엄마는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고 있을까? 언제 어떻게 아들이 돌변할지 모르고 언제 폭력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불안은 어쩌면 평생 함께한 그림자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폭력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작가가 있다면 Artemisia Gentileschi를 떠오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자치고 너무 큰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늘 안타까워했다.  딸아이가 만약 남자였다면 당대 최고의 작가로 성장했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는 자식의 재능을 썩히기가 어려워 당시 친분이 있던 타시라는 궁전화가 친구에게 미술 지도를 부탁한다. 하지만, 타시는 딸아이의 몸만 탐할 뿐이다. 결국 부녀는 타시를 고소한다. 


Gentileschi가 순결한 여자인가 아닌가는 이 재판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타시가 손대기 전 순결하였는지 아니면 이미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었는지에 따라 유무죄가 판단될 것이다. 이내 동네 사람들의 가장 핫한 입방아 토픽은 단연  Artemisia였다. 얼마나 헤픈 여자인지 혹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파렴치한 여자인지 입과 입으로 과장되고 전달되어 눈덩이처럼 불려졌고 Artemisia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고립되어야 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Artemisia와 결혼할 남자를 다른 지방에서 찾았고 둘은 늦은 저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다른 지방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미술사에서 Artemisia Gentileschi의 작품은 늘 그녀의 과거의 아픔과 연결이 된다. 그녀는 여러 작품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표현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중요한 미션을 완성하는 여성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적을 향해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잔인하게 죽인다. 날카롭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 어떤 흔들림 없이 피가 낭자한 상태로 생명의 줄을 뚝 끊어버린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날카롭게 노려보는 여성의 얼굴도 망치로 내려치려는 여자의 모습도 작가의 얼굴이다. 작가는 풀지 못한 한과 분노와 억울함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림에서 여자는 연약하게 당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해 보이는 건 제대로 한번 반항도 못해보는 남자들이다.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Gentileschi의 그림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실 이 글의 방향을 그것이 아닌 아픔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싶다. 그녀의 과거 억울함과 분노와 답답함이 암덩어리처럼 그녀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줬음이 분명하다. 곱씹고 곱씹을 때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 분노가 그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대작을 만들 수 있는 에너지로 사용이 되었다는 건 작가로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도 매우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거라 믿는다. 


아픔과 분노와 불안과 슬픔과 억울함은 어떻게든 삶에서 삐져나와 표현이 된다. 그 표현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분출될 때 상처는 아물고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올 때 또 다른 폭력이 되고 그 폭력은 또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낸다.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처음 학기 시작하고 두 달 정도는 착실하게 학교를 다녔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수업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숙제도 더 이상 내지 않았다. 꽤 착실했던 학생이었기에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던 차 그녀는 큰 가방을 메고 수업이 끝난 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가방은 군인들의 배낭처럼 컸다. 


그녀는 내게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지만 내 수업이 너무 좋았기에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빠의 폭력이 점점 심해져 엄마와 동생과 집을 나왔다고 했다. 지금은 지인의 집 거실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며 배낭에 그녀의 옷과 세면도구 같은 생필품을 급하게 챙겨 나왔다고 했다. 곧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정부 보조 아파트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언제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날도 어느 날의 월요일처럼 나는 어떤 표정과 말투로 그녀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가벼울 수 없는 대화에서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할 수 도 없었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꼭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할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에 제삼자인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가장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가볍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그 아픔들이 어떻게든 건강하게 표현이 되고 치유의 물고를 틀 수 있길 깊이 바래본다. 


어쩌면 나도 그래서 글을 쓰는지 모른다. 

내 안에 깊이 박힌 절망이었던 순간과 억울함이 가득했던 순간 혹은 슬픔이 목구멍에 차올랐던 그 순간들이 건강하게 표현되고 나를 향한 다짐이 되어 다시 나를 향한 치유의 물고를 트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소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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