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잡러의 미술관
신경질적이고 깐깐한 말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린다. 그녀의 말투와 질문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강박 같은 게 느껴졌다. 수많은 질문과 답이 오고 가고 그녀를 병원 오피스에서 만났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어르신이었고 왜소한 체구였다.
전화기로 듣던 깐깐한 말투가 조금 수그러진 것 같다고 느꼈지만, 이내 그녀의 강박적인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손이 닿아 전해진 모든 물건을 그녀는 닦기 시작했다. 휴지 한 장으로 쓱쓱 닦는 게 아니라 8-9장을 꺼내 펜을 닦고 신분증을 닦는다. 그녀는 마치 청소를 하기 위해 온 사람처럼 자기가 앉을 의자도 닦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손에는 휴지가 뭉탱이로 들려 있었다.
답답해 보이는 장갑, 온 얼굴을 가린 그녀는 집요하게 묻는다.
"이거 소독 한건 가요?"
"이거 닦은 거죠?"
"이거 다른 사람이 쓰던 건가요?"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는 햄스터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무례한 사람이라 느껴졌지만, 불안이 머리와 손발 끝까지 지배하고 있는 왜소한 어르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불안이 지배하는 삶은 가시밭을 맨발로 걷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맘 편하게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이 없어 매번 가시밭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불안은 몸을 정복하고 마음을 정복하여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하게 만든다. 불안으로 가득한 집안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주변 가족의 불안을 빨리 감지해야 다음 말과 행동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Richard Serra의 작품 안에 들어서자 사방이 꽉 막혀 답답했다. 급격하게 만들어진 커브와 점점 좁아지는 통로는 그다음 무엇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마저 들었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몸을 구겨 넣는 마음으로 통로를 통과하고 커브를 돌자 갑자기 내 눈앞 뻥 뚫린 빈 공간을 마주했다.
굴곡을 지나 협소한 통로를 지나 도대체 앞에 무엇이 벌어질지 알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 갑자기 나타난 통로의 끝 그리고 확 트인 공간 안에서 나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작품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그 짧은 순간이 인간의 삶 같아서 눈물이 흘렀고, 고통과 고난의 시간 혹은 외로움과 불안의 시절들이 언젠가는 끝을 맺겠구나 싶어서 안도하는 눈물이었다.
그래서 내게 Richard Serra의 작품은 매우 사적인 예술품이다. 그는 내게 불안에서 자유까지 인도해준 작가였다. 사적인 공간을 허락한 작품이자 내가 물리적으로 작품 안에서 순수하게 온몸으로 감동을 만끽한 몇 안 되는 작품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면 그때의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쓴 펜을 도저히 만지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가방에서 자신의 볼펜을 찾아보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크리넥스에서 휴지 서너 장을 꺼내 내 펜을 닦았다. 마치 잡귀라도 붙은 물건을 대하듯이... 그리고 다시 펜을 서너 장의 크리넥스로 감싼 뒤 서류에 사인을 했다.
나는 그녀가 무례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불안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내가 경험한 Richard Serra의 작품 속에 들어가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자유를 맛보고 경험하게 해 줄 그런 기회 말이다.
Richard Serra의 작품은 워낙에 거대해서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으로 그 안과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과 어디에서 어떻게 좁아지고 넓어지고 큰 공간으로 이끄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시선 말이다.
삶에 무엇이 어떻게 펼쳐지던 그 끝에는 자유가 있을 것이다.
그 자유가 물질을 통해 이뤄지던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던 잠시 우리에게 숨 쉴 틈은 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좁고 굴곡진 어딘가로 우린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고 또 걷다 보면 탁 트인 어딘가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마다 불안이 조금씩 덜어지면 좋겠다.
경험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또 사람을 통해서... 불안을 겹겹이 입는 게 아니라 조금씩 벗어버릴 수 있다면 탁 트인 자유 앞에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다음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난 이번처럼 그녀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할 것이다.
내가 베푸는 작은 친절이 그녀의 불안을 조금 누그려 트리 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