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은 교회 밖 일상에서 더 찐하게 만들어진다.
교회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매우 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써 내려간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기도문을 적은 지 만 4년이 넘었고 지금은 큐티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자리 잡은 내 삶의 루틴이 되었다.
내 큐티의 시작은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겠다 싶은 상황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난 하나님의 위로가 절실했고 그분의 인도하심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너무나 절실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게 성경이고 내 구구절절한 기도를 적기 시작한 게 그때즘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글씨로 써 내려간 나의 노트는 이제 12권이 되었고 그것이 내 삶의 기둥이 되고 기초가 되었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큐티로 거듭났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말씀 읽기로 튼튼한 믿음의 근육을 키웠다. 튼튼한 믿음의 근육이라고 표현하는 건 우리 몸 근육의 기능과 영적인 근육이 하는 일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근육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고 자세를 유지할 수 있듯이 영적인 근육의 강건함은 일상을 살아가고 유지하는데 평화와 안정과 조화를 이루게 한다.
교회를 떠난 지 이제 1년이 되었고 나와 남편은 더 이상 사모로 목사로 불리지 않는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이제야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숨이 쉬어진다고 하면 너무 과장한다고 말할까 싶지만 정말이지 난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목사와 사모라는 타이틀에 얽매어 있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내 삶에 생기라는 건 교회가 아닌 가정과 직장에서 뿜어져 나왔다. 난 왜 그렇게 교회가 힘들었을까?
어렸을 때 교회를 가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인 것처럼 배웠다. 천국의 문 앞에서 내 평생 주일성수를 지키지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이유가 될 것처럼 배웠었기에 교회를 안 간다는 것은 큰 죄이자 내 구원의 문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 배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몸담았던 교회라는 곳이 과연 건강했을까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니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지고 충분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아나니아처럼 죽음을 당할 거라는 협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되어 진리인 듯 듣고 자랐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충성을 다해 봉사하고 내 시간과 재능을 다 털어 넣고 영혼을 갈아 넣어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아주 어린 시절 내게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교회는 평생 부담이었고 마음 한구석 치울 수 없는 무거운 돌덩어리였다.
그렇게 자라온 내가 목사를 만나 목회를 20년 동안 하면서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어떤 장소여야 할까? 물론 말씀을 듣고 위로받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가장 이상적인 답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성도의 헌신이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헌신을 구걸하거나 강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찬양을 인도할 사람, 악기를 연주할 사람이 필요하고 헌금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며 화장실과 예배당을 깨끗하게 청소할 사람도 필요하다. 자라나는 꼬물이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선생님도 필요하고 노인들 운전을 맡아줄 드라이버도 필요하다. 그뿐인가? 교회에서 밥과 국은 꼭 먹어야 하는 한국교회는 식당일을 맡아줄 성도들도 필요하다. 이중언어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에선 다른 언어로 동시통역을 할 사람도 필요하고 예배당을 관리해 줄 사람들도 필요하다. 물론 월급을 받고 일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교회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어떻게든 교회를 위해 무보수라도 봉사를 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성도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그런데 교회는 특히나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목회자들은 그게 되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며칠 되지도 않는 휴가를 써서 여름성경학교에서 봉사를 하고 단기선교에 가라고 쉽게 말한다. 가정보다는 교회에 더 열심을 쏟아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흥할 거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또 믿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주중에 직장에서 멘털이 털린 상태로 주말에는 교회 봉사를 하며 나머지 멘털도 탈탈 털린다. 그럼 그들은 무엇으로 굶주리고 메마른 영혼을 채울까?
물론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찬양을 드리며 펑펑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이 내 영혼에 너무 갈급한 그 찬양의 가사가 나를 감싸고 뜨겁게 안아줬던 그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매주일마다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목회자인 사촌동생이 그런 말을 한적 있다. 영화만큼 드라마만큼 소설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설교는 없다고 말이다. 난 그 말이 너무 인상 깊었다. 얼마나 솔직한 대답인가?
도대체 교회는 어떤 형태로 존재되어야 할까? 사실 지금까지도 나는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내가 교회를 떠남으로써 얻은 것은 자유이고 그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 움직였다는 것이다.
나는 팬데믹이 교회가 건물이 아님을 알려줬던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 여긴다. 함께 모이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 코로나로 인해 함께하면 해로운 것이 되었다. 대신 줌이라는 신문물이 사람을 모이게 만들었다. 건물이 아닌 온라인에서 피부와 피부가 맞닿지 않는 곳에서 화면으로 목소리로 모였다. 그럼 그때 교회는 기능을 잃었을까? 교회는 건물인가? 사람인가?
성경은 단 한 번도 교회를 건물이라 칭한 적 없었다. 교회는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상처와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사람이기에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교회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상처와 불안정 투성이인 교회를 매주 가야 하는 걸까? 주일 성수는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아 니 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다. 그가 만드신 모든 창조물은 그가 어떤 분인지를 대변한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교회 밖에서도 언제든지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 오직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린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에 한계를 짓는 일이다. 그것은 오만이요 교만이며 죄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영적인 순간이다. 내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며 하나님을 느끼듯 지인이 원소기호표를 보며 하나님을 느끼듯 하나님의 존재는 어디에나 있다.
남편이 목회자일 때 봉사하는 스태프들이 너무 지치지 않게끔 쉼을 가질 수 있도록 했는데 그날은 교회를 가지 말고 가족과 공원에 가라고 했었다. 물과 나무와 풀과 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라고 말이다. 뭐 주일성수를 하지 말고 놀러 가라고?
그렇다. 놀러 가라.
주일에 놀러 가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속에서 그의 오묘하심과 디테일과 배려심을 맘껏 누리고 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교회밖 일상에서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주일성수_안해도_괜찮아
#하나님은쪼잔하지않다
#하나님은교회보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