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수 없는 남자들, 울 수 없는 리더들

남자다움보다 사람다움을 원합니다.

by MamaZ

압살롬의 죽음은 다윗에게 아버지로서 매우 큰 슬픔이었지만, 왕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자 저지른 만행은 아버지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차라리 남이었다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 매우 간단한 일이었을 텐데, 내 새끼가 날 죽이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비참한 것이다.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듣자 다윗은 아버지로서 반응하였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절규이자 절망이자 슬픔이었다. 하지만 다윗의 충신인 요압은 그런 다윗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당신과 당신의 나머지 자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목숨 걸고 싸웠는지 아십니까? 지금 왕을 구한 우리 앞에서, 왕을 죽이려 했던 그 배신자 아들의 죽음 때문에 울고 계십니까? 지금 당신의 감정적인 행동이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사기를 얼마나 떨어뜨리는 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노력을 왕께서 무가치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차라리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다 죽었으면 왕께서 기뻐하셨겠군요! 왕으로서 행동하십시오! 왕의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압은 정말 충직한 부하였을 것이다. 그는 왕이 시키는 일이라면 아무리 옳지 못한 일이라도 (예를 들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 말끔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충직한 부하의 입장도 헤아렸기에, 다윗은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고 백성들 앞에 섰다.


나는 요압의 그 냉철함이 너무 싫다.
요압의 말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을 잃은 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줬다면, 충분히 그가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윗을 향해 조금 더 친절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요압의 생각과 말이 옳다고 해도…


언젠가 내가 사는 이 동네에, 목회자 자녀가 교회 주차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절망적인 사건이 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슬픈 사건은 한인 커뮤니티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식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장례식을 인도하고 어머니는 찬양을 인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때 그들이 왜 그래야 했는지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목회자인 부모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부모가 아니라 목회자여야만 했는가 싶어 더욱 절망스럽다고 느꼈다.


안타깝게도 리더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대중은 매우 냉철하며 감정적이지 않은 자세를 유지하길 바란다. 당신 자신보다 우리를 더욱 먼저 생각하길 바라며, 그것이 바람직한 리더의 자세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그것이 완벽한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그런 냉철함을 우리 사회는 유독 "남자"들에게서 보길 원한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씩씩하며, 울지 않고 견디는 것이 남자다운 모습이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라 여긴다.

"남자는 태어날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운다"는 말 속에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이 얼마나 남자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남자다움을 강요할 때, 사람다움을 놓치게 된다는 건 왜 모를까 싶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목격하셨을 때,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11장 35절에 있다. 하지만 그때 어느 제자가,
“아니 주님, 지금 여기서 우실 때입니까? 지금 당장 고쳐야 할 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질질 짜십니까?”
라고 말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 『Wonder』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옳음과 친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선택하세요."


세상이 절실하게 필요한 건 마초가 아니라, 친절과 배려다.


#리더의눈물

#친절을선택하라

#다윗과요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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