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각정리

Rain Room, 그리고 인생의 비

영원히 내리는 장대비는 없다.

by MamaZ

늦은 밤 창문을 열자 빗소리가 들렸다.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고 1층 거실에 있던 남편에게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라고 문자를 보낸다. 신선한 가을 공기에 빗소리를 나 혼자 듣기엔 너무 좋으니까. 빗소리가 평안함을 줄 땐 사실 듣는 이가 실내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아도 되는 안전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을 때다. 내 몸 하나 안전하고 따뜻하게 피할 곳 없는 상황에서 빗소리가 귀에 들리겠나? 온몸이 축축 젖어 처량하게 비를 맞는 이에게 비는 그냥 빨리 멈췄으면 좋을 귀찮은 존재일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가 2019년 12월이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6년 전이다. 그때는 코비드가 인류를 강타하기 직전이었고 팬데믹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일상에서 등장할 거란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투잡을 뛰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강의를 많이 하던 시기였다. 거의 매일 다운타운에 출퇴근을 하면서 정말 많은 학생들의 굵직한 인생 상담을 하게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난히 도드라지게 많은 이들이 강의실에 남아 울고 도움을 요청했던 그때 농담 삼아 나한테 목사 사모 냄새가 나냐는 말을 하곤 했다. 공립 대학에서 일하면서 그 어떤 종교적인 자세를 취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도 그들은 날 찾았고 상담을 청했다. 고작 시간 강사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기도 하고 따뜻한 차를 사주기도 하며 그들에게 내 시간을 내어주었고 그게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날 찾았던 건 어쩌면 내 강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예술을 통해 힐링을 얻고 위로를 얻었던 만큼 내 강의를 듣는 이들 역시도 내가 얻은 위로를 똑같이 전달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강의를 하는 이유는 위로를 하기 위함이다. 내 인생 가장 방황했던 20대 시절 좋은 어른에 대한 목마름 같은 게 있었다. 좋은 어른을 만나 응원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기에 나라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과 내 직업이 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순간들이 강의를 하면서 있었다. 그런 바람과 내 강의의 목적이 누군가에게는 찐하게 와닿아 나라는 사람을 찾아주고 인생의 큰 고비를 함께 나눠주니 그것도 사역인 것이다.


언젠가 나는 커다란 등산 배낭을 둘러매고 내 강의실을 찾았던 그 여학생을 잊을 수 없다. 그 가방에는 옷과 담요 치약 칫솔 같은 생필품이 있었는데 그건 그녀의 전재산과도 같아 보였다.


"교수님, 나는 오늘이 아마 당신의 수업을 듣는 마지막 날이 될 거예요.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오겠지만 아마 다시 오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요."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왔다는 그녀는 그 큰 가방에 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 학교로 왔다고 했다. 그녀와 엄마 동생까지 모두 집을 나와 지인의 집으로 몸을 피했는데 아무래도 자기가 나서서 살 집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영어를 못하고 동생은 너무 어리니까. 그녀보다 더 커 보였던 그 배낭에 눈이 갔던 건 그것이 지닌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뿐만 아니라 존엄이기도 했다. 살기 위함이 아니라 제대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발버둥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고 응원한다고 했다. 그런 너를 신이 꼭 보호해 줄 거라며 다시 올 수 있다면 내가 수업에 따라잡기 위한 모든 걸 돕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나는 알았다. 그녀는 다시 내 수업에 들어오지 못할 거란 걸.




2019년 한국 부산 현대미술관에서 Rain Room이라는 전시가 있었고 나는 말과 글로만 전해 들었던 이 작품을 직접 가서 체험했다. 깜깜하게 어두웠던 그 방에는 불 한 개만 켜져 있었고 천장에 설치된 장비는 장대비 같은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물비린내가 있었고 빗소리만 가득했다. 이 전시의 목적은 단순히 비를 맞지 않고 비를 경험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장에 3D 카메라가 설치되어 관객을 감지하면 관객이 서있는 그 자리에만 비가 떨어지지 않게끔 프로그램이 되어 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비를 빗속 안에서 젖지 않고 경험할 수 있는 판타지 같은 일을 현실로 재현한다.


이 전시를 내 인생 최고의 전시 중 하나로 뽑는 건 예술작품에서 "영성"을 느낀 건 정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특별한 기분.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내가 존재하는 그 공간에는 비를 오지 않는다는 그 특별한 순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인 것이었다.


며칠 전 이 작품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문득 그 큰 가방을 들었던 그녀와 최근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나의 소중한 누군가가 오버랩되었다. 갈 곳 없는 처량한 인생처럼 보일지라도 내 몸하나 편히 누일 공간이 없을지라도 그 큰 가방을 짊어지고 가야 할지라도 빗속을 뚫고 가야 할 때가 인생에는 누구나 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억수로 쏟아지는 그 장대 같은 비를 그냥 맞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러운 건 우리 인생에서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장대비를 뚫고 지나가면 또 내 한 몸 쉴 공간이 생기고 그런 날 받아줄 인연들도 생긴다. 그리고 그 공간과 인연들이 보호막이 되어 내 자리의 장대비를 막아준다.


영원히 내리는 장대비는 없다.

그러니까 비를 맞아야 할 땐 맞자.

다 괜찮을것이다.


#rainroom #random_international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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