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의 견고함이 무너지는 슬픔.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

by MamaZ

살아있는 건 움직인다.

사람도 동물도 곤충도 작은 미생물도 살아 있어서 움직인다. 나무도 화초도 꽃도 해를 향해 몸을 틀기도 하고 등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바람도 물도 땅도 태양과 별도 움직인다. 생명이 있다는 건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커다란 몸짓과 손짓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흠찟하고 움쭐하고 꼬물거리기도 한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건 죽은 것이다.

생명이 사라지면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작고 미세한 움직임도 없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옮겨져야만 한다.


한 주 동안 살아있음이 만들어낸 죽음을 접했다.

땅은 마치 기지개를 켜듯 몸을 틀어 진동을 했고 땅 위의 생명은 땅이 만들어낸 진동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몇 백에서 몇천 이제는 몇만 명인데 그게 십만이라는 단위로 올라갈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분명 각자의 삶 속에 특별하고 감동적이고 즐겁고 슬픈 이야기가 가득 있었을 텐데 지진 이후로는 이름도 없는 수만 명 사망자 중 한 명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은 생명이 갑작스럽게 떠나가는걸 매우 쉽다 못해 흔하게 접한 몇 년이었다. 팬데믹이 그랬고 산불이 나서 그랬고 홍수가 나서 그랬고 이태원이 그랬고 지진이 그랬다. 세상은 늘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 했다.


삶은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고 사라진다. 생명은 절대 견고하지 않고 튼튼하지 않다. 그런 생명들이 만들어낸 부수적인 모든 것 역시 마찬가지다. 건물도 무너지고 경제도 무너지고 시스템도 무너진다. 너무 쉽게 말이다. 우리 인생에서 영원할 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은 단 한 개도 없음을 다시 실감한다.


Käthe Kollwitz, Memorial for Karl Liebknecht


Kathe Kollwitz의 작품은 움직이는 생명과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죽음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 아직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는 모습을 담는다. 표정, 눈물, 제스처는 아직은 살아 있음을 담지만, 죽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는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슬픔이 그곳에 깊이 파묻혀 있다. 슬픔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작가는 말한다.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 그것은 더욱 살아있음을 강렬한 것으로 만든다.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강렬한 생명. 어쩌면, 그것은 공포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Käthe Kollwitz, woman with dead child

사실 나는 이 글을 누군가를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해 써내려 갔지만, 글을 며칠째 다듬고 지우고 다시 쓰며 남은 이들에게 행여 상처가 될까 싶어 발행을 망설이고 있다.


뉴스 너머로 들리는 이야기가 아닌 내 가까운 주변에서 자식을 먼저 보낸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에 수많은 감정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 마음은 Kathe Kollwotz의 작품이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작품은 슬픔을 달래지 않고 극대화시키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슬픔을 전달하고자 했다. 슬픔 말고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작품 안에 내가 상상할 수 도 아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모습이 있다. 떠난 자식을 놓을 수도 없고 포기할 수 없음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크게 울다가 지치면 속삭이며 울고 속삭여 울 힘도 없으면 그저 멍하게 앉아 있을지도 모를 어미의 슬픔을 나는 이깟 허접한 글로 추모를 하고 위로를 하고자 하지만, 이내 알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나는 무엇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함께 같이 우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겠는가 싶어서…. 지금 당장 내가 살아있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기도를 하고, 글을 쓰고,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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