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잘못 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자들은 병을 고치는 예수를 보았다.
오그라든 손이 펴졌고 장님이 보았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걸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즉 물리적으로 경험한 기적이었다. 물리적 경험이란 매우 극적인 것이다. 평생 안되고 불가능하던 육체적 움직임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예수 곁에 머물며 기적을 체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배에 타고 가는 길 폭풍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덮쳐 침몰하게 되었고 제자들은 패닉에 빠진다. 하지만, 예수님은 곤히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제자들은 예수를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깨운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모른 척하십니까?”
그들이 그렇게 따르던 선생에게 차라리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반응에서 나는 인간의 악함을 본다.
뭐가 뜻대로 안 되고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린 도와주세요라는 말보다 탓을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도 아담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과일을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말했지 않은가?
내가 잘못된 것은 신의 탓인가?
어쩌면 인간은 신의 탓으로 돌려야 자신의 실수가 타당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의 악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성난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해 주고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마가복음 4장 40절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예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내 두려움을 치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내가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죽겠는데 당신은 뭐 하는 겁니까? 대신에 내가 지금 죽겠는데 살려주십시오. 살아갈 힘을 주시고 내 두려움의 뿌리를 도려내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예수님은 또 얼마나 다정하게 날 대하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