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쪽팔린 존재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선악과를 먹자마자 느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야 하거늘 그들이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이었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감정인가.
"아 어쩌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겼어"가 아니라 "아 놔 우리 벗은 것 좀 봐. 쪽팔려 어째" 였다는 거다.
하나님을 떠나고 죄가 잠식하면 인간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스스로가 쪽팔리는 존재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가 너무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소중한 자녀다.
내가 내 아들을 너에게 주었다.
내 아들이 널 위해 대신 죽었다.
더 이상 쪽팔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복음인데 진정 쪽팔린 자들을 위한 메시지다.
하지만, 죄는 수치심을 동원해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고 별로이며 쪽팔리는 존재인지 각인시키며 복음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어디 감히 너 따위가
너 같은 애를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수치심은 절망으로 이끌고 희망과 멀찍이 떨어지게 한다. 숨어야 하고 숨겨져야 할 것 같은 그런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더욱 멀찍이 있으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쪽팔림을 가리고 무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한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 지옥이 되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고 내 허함을 닥치는대로 채우지만 공허하다.
shame...
사탄이 가장 잘 써먹는 수치심은 원죄로 태어난 감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언제나 한결같이 쪽팔리는 존재라 여길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신과 함께 한걸음 한걸음 수치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 것이다. 그것을 매일 반복하는 게 신앙인의 삶이고 그게 믿음생활이다.
내 쪽팔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 공허함이 그리스도의 피로 채우는 것.
그래서 나의 존재 가치가 그리스도의 피만큼이라는 걸 아는 것.
믿음은 존재 가치를 바닥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린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이사야 5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