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imt랑 놀았다
뉴욕에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한 건, 15년 전 내가 경험했던 짜릿한 현대 미술관의 추억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막 대학원 졸업을 하자마자 대학 강사로 취직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선생님으로서 또 작가로서의 열정이 뜨거웠던 시절이다. 뉴욕에 사는 친구 집에 방문해서 매일 온갖 미술관을 다니고 저녁에는 모여 앉아 찌개와 누룽지를 만들어 먹고 온갖 수다를 떨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20대 후반, 석사 학위를 받고 어디서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나이였다.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피부를 지녔고, 새벽같이 일어나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 있었다. 우린 모두 예뻤고 순수했고 열정이 있었다. 물론 우린 지금도 40대에 맞는 아름다움과 여전히 작품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을 지니고 있지만, 그 열정이란 녀석은 자식을 키우고, 돈을 벌고, 가정을 지키는 데 사용되고 있기에 미술에 대한 열정은 한 풀 꺾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꺾인 예술혼을 향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인생을 살다 보니 예술로 먹고 산다는 게 얼마나 궁핍해져야 하는 일인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만 그리면 행복하고 즐거울 것 같던 그 시절도 막상 당장 내야 하는 렌트비와 전기세 수도세를 생각하면 깊은 한 숨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라는 신세타령을 하게 되었으니까.
나 역시 현실에 타협을 하고 지냈지만, 그래도 나는 강사일을 놓지 않았고 작가로서가 아닌 선생으로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걸 나누는 일을 해왔다. 그러면서, 미술 작가로 사는 것보다 작품을 보고 글을 쓰는데 더 큰 재주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는 미술관에 방문한다는 것은, 선생으로서 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방문한다. 내게 영감을 주고 내 영혼에 말을 걸어주는 작품을 보는 것. 그것이 누구의 어떤 작품이던 상관없다. 그저 내게 말을 걸어주기만 하면 나는 좋다고 반응하니까 말이다.
15년 만에 방문한 뉴욕 여행의 목적 역시 그러했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작품을 찾아서 글을 쓰고 강의에 생동감 있게 그 작품의 모습과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5년 전 내 몸 하나만 잘 건사하면 되었던 시기를 지나 아이를 데리고 뉴욕을 가자니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모험이었다. 아이에게 뉴욕은 더럽고,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럽고, 냄새가 나고 덥고 피곤한 곳이었다. 이런 아이를 데리고 또 걷다 보니 미술 작품은 내게 침묵했고 오직 내 새끼만 내게 말을 건다.
"엄마, 우리 언제 집에 가?"
그런 녀석을 어르고 달래고 맛난 것을 입에 넣어주고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던 차 지쳐 나가떨어지려는 내게 말을 걸어주는 작품을 만났으니 Gustav Klimt의 Mäda Primavesi라는 작품이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한 소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다. 꽃으로 장식된 드레스와 라벤더빛과 컬러풀한 백그라운드는 소녀의 취향과 감성이 가득 묻어난다. 목이 유난히도 길어 보이는 소녀가 뒷짐을 진 것처럼 두 팔을 뒤로 가져갔다. 소녀가 뒤에서 자신의 두 손을 잡고 있을지 아니면 허리를 받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한 손에는 사탕 같은걸 움켜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어떤 쑥스러움도 낯가림도 없이 관객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소녀의 눈빛은 자신감 넘치는 당당함과 순수함, 궁금함과 짓궂음이 어우러져 있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단계에 접어든 소녀는 무서운 것도 슬픈 것도 두려운 것도 없어 보인다. 16000보에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은 동양인 아줌마와 입술을 삐쭉이는 한 아이를 바라보는 소녀는 이 모든 것이 흥미롭게만 느껴지는 듯하다. 딸아이도 이 소녀를 보았다. 구시렁 거림을 멈추더니 이내 소녀의 그림이 너무 아름답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 때의 두 아이가 마주 보고 있으니 더욱 흥미로워진다. 둘 중 누구라도 말을 걸 것 같다.
"같이 놀래?"
아이들은 참 쉽게 누군가를 사귀고 매우 빠르게 그들을 "친구"라고 말한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다면 "베프"라고 한다. 아이에게 친구란 즐겁게 놀이를 하며 웃고 떠들 수 있는 동무를 칭하는 것일 게다. 그런 동무를 만남으로서 부모가 채워주지 못하는 또 다른 인생의 주머니를 채워준다. 인생의 여러 "친구 주머니"를 우정으로 사랑으로 즐거움으로 채우다 보면 그게 모여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역할을 한다. 서로의 주머니를 채워주며 우정은 그렇게 쌓이고 만들지지만, 동시에 나 역시도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워줘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상호작용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관계를 만들지 않겠나.
좋은 친구 사귀기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
이 모든 것을 둘이 동시 다발로 함께 한다면, 얼마나 멋진 우정이 만들어지겠는가.
사람은 서로 같이 함께 하는 존재니까 함께 동시에 서로를 위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Gustav Klimt
Mäda Primavesi
The Met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