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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에게 쓰는 편지

"지극히 개인적 감성팔이 주의"

by 잡이왼손

나는 기억한다. 오늘 네가 어떠한 하루를 보냈는지를 말이야.


너는 비몽사몽 대며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으라는 할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침밥보다 늦잠을 더 소중히 여기며 학교로 걸어가겠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오전 수업을 듣다가, 교과서 속 위대한 인물들에 수염을 덧그리며 남은 수업 시간을 버텼을 거야.

점심에는 군말없이 급식 아주머니들이 주는 대로 식판에 메뉴를 받고 칭찬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남김없이 밥을 다 먹겠지. 누가 스티커를 가장 많이 모아 피자 쿠폰을 얻을지 경쟁하겠지만, 넌 그보다 급식실 벽에 붙은 "농부들이 피땀 흘려 지은 우리쌀" 이라는 문구에 더 열정을 불태우며 밥을 먹었겠지.

하교 시간이 되면 너는 곧바로 짐만 챙겨 수학과 영어학원으로 향할거야. 대학입시라는게 뭔지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나이일텐데, 지금 공부가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될거라는 어른들의 그 확신에 찬 말에 점점 더 늘어갈 일만 남은 공부시간은 알지 못하고, 열심히 수식을 풀고 영단어를 외울거야.


그리고 넌 집에 돌아와 블럭을 쌓는 게임 영상을 보다 잠에 들겠지. 그렇게 행복한 하루를, 그러한 일상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는 감각을 깨닫지 못한 채, 24시간이라는 시간을 줄곧 흘려보내며 살고 있을거야.

그러다 이따금씩, 너는 여러 번 지금이 아닌 먼 미래에 눈길이 가는 순간이 있을 거야.


스트레스에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밤잠을 설쳤을 때,

혹은 무대에서 빛이 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같은 거 말이야.


미래라는 건 너무나 불분명하고 모호해서 먼 미래일수록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 어릴 때 모든 남학생들이 축구선수나 대통령이 되는 걸 꿈꾸니까 말이야.

나는 너보다 약 10년 앞선 삶을 살고 있어. 나는 법적으로 성인이어서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고, 밤늦게 술도 먹을 수 있고, 부모님 동의 없이 게임에 현질도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런 건 너가 굳이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할 수 있는 것들이야. 그리고 너는 내가 이미 보내버린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

그래서 너에게 몇가지 하고싶은 조언들이 있어. 분명 내 조언을 듣지 않아도 너는 훌륭한 너가 되겠지만,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20대 사촌 형이 보내는 후회섞인 푸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줘.

너의 몸을 더 소중히 아껴줘. 너는 나보다 더 규칙적인 하루를 살고 있단다. 어두운 밤에 자고 밝은 낮에 깨는 삶을 말이야. 하지만 넌 곧 몸과 키가 커지면서 체력도 늘고 고민도 늘어나 밤을 새우고 싶은 날이 많아질 거야.

너도 밤을 새봤다면 알겠지. 삐뚤빼뚤하고 못난 하루에 지쳐 어떠한 자극도 더 느끼지 않아도 되는 어둡고 고요한 밤공기 안에 나만이 존재하는 느낌을 말이야. 20대가 되면 원치 않아도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보내게 되고, 서로의 경계가 애매한 날들이 많아지면 나는 가끔 내가 잘 살고 있지 못한가 하고 우울해질 때도 있어. 너는 그러한 우울함을 느끼기엔 아직 어리단다. 그러니 너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걸 감각하며 잠에 들렴. 그러면 조금이라도 나보다 더 큰 키를 갖게 될지도 몰라.

공부하는 건 좋지만, 친구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렴. 다시 생각해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짧단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추억을 발견할 때면 내심 부러워져. 나는 왜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지 하고 말이야. 너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꽉 차버린 마음에 친구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렴. 그리고 그들과 나눈 추억들을 글로 기억해 두렴. 그들이 잊어버리더라도 네가 그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네가 꿈 많은 아이라는 걸 기억한단다.

남들보다 일찍이 진로를 정해버린 건 네가 꾸는 꿈만큼 가진 재능이 너무 많아서라는 걸 몸으로는 이미 깨달아서 그랬는 건지 몰라. 너무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불행처럼 다가와 걱정 어린 마음에 길을 하나로 단정 지어버린 거지. 하지만 그 많은 선택지를 굳이 하나로 좁히지 말렴.

그 모든 길들은 한 번쯤은 걸어볼 가치가 있단다. 그리고 그 경험은 처음 보는 길도 더 익숙하게 걷게 해줄 너만의 이정표가 될지도 몰라. 이 길을 걸어봤으니 저 길이 어떤 식으로 다른지 너는 알 수 있을테니까. 지금의 나도 여러개로 나뉜 길 중에 어디를 가야할지 헤매고 있단다.

하지만 난 그 고민을 즐기고 있어. 세상에 길은 많고 내가 걸을 길 하나 없지않다는 것을, 너보다 많은 시간을 지나온 나는 알고 있으니 말이야. 또 나는 서로 떨어져 있는 길을 이어볼까도 생각해. 그 두 길을 잇는 새로운 길을 직접 닦고 포장하면 그 길은 내가 최초로 걷게 될 테니까.


나는 네가 이 글을 읽고 잊어버렸으면 해.

내가 쓴 이 글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남은 나의 미련일 뿐, 너의 운명을 점지해 주는 예언서가 아니니까.


네가 어떤 21살이 될지 나도 몰랐고, 10년 후의 내가 어떤 어른이 될지 나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네가 어떤 어른이 될까 궁금하겠지만, 어린 나 자신에게 편지까지 써줄 정도면 꽤나 괜찮은 어른이 된 거 아닐까?

그러니까 너의 모든 불안과 걱정은 이 글과 함께 잊어버리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또 행복한 아침을 시작하면 좋겠어. 지금을 즐기렴.


2023년 가을의 내가 나보다 어렸을 모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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