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뭐 별거라고
친구사이는 참 복잡하면서 너무 간단하다. 옆집에 이사 온 아이가 동갑이면 엄마가 친구라고 하는 게 K-문화인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같은 반이라도 되는 날에는 첫 학기부터 친구가 30명씩이나 생긴다.
학창시절에는 이렇게 친구 사귀기가 쉬우면서도 어른이 되면 곧잘 친구를 찾기 어렵다. 친구라는 단순했던 호칭은 선후배, 직장동료, 거래처 사장님 등 다양하게 대체돼버린다. 그래서 남는 건 고향 친구 정도?
나에겐 친구 A, B가 있다. 두 친구 모두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이며 매일같이 어울려 다녔다. 다만 A는 입시실패로 외국으로 유학을 갔고 B는 다른 대학을 갔지만 지금도 자주 어울려 다닌다. A는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둘 모두 소중한 친구이다.
겨울에 A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B와 내 친구들은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A는 약속 날짜를 5일 미뤘고 약속날짜가 다가옴에도 A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A는 가족 약속이 생겼다며 약속을 파투 냈고 A의 sns에는 약속 전날까지 다른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사진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A가 학창시절에도 그런 애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도 A에게 실망했고 지금은 그때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자신을 속인 나에게도 실망하고 있다.
상대방과 왜 친구인지 아는 방법은 2가지다.
첫째, 내가 이 사람과 무엇을 공유하는가.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물어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디 사세요?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형제나 자매가 있으세요? 드라마 좋아하세요? 저도 그 드라마 봤는데.
당연하게도 관심사가 같으면 사람은 쉽게 친밀해진다. 내가 좋다는 거 너도 좋다는데 싫을 건 없으니까. 관심사를 통한 공유는 sns에서 파다하게 일어날 만큼 사람들은 공유에 진심이다.
둘째, 이 사람과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학창시절에 만들어지는 친구들은 매일 봐서 생기는 것이다. 환경적으로 자주 만나는 만큼 사람은 친밀해진다. 매일 보는 얼굴은 익숙해지고 뇌는 그 사람을 자연스레 기억할 테니까. 사실 B는 나와 공유하는 관심사가 거의 없다. B는 요리와 음식을 좋아하고 축구게임을 즐겨하며 나는 이와 정반대다. 굳이 꼽자면 둘 다 드라마를 즐겨보는데 서로가 서로의 드라마를 전혀 안 본다. 그럼에도 B와 친구인 이유는 지금에도 자주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가 된 이유가 무엇이든 두 종류의 관계 모두 무너진다. 동아리나 동호회 같이 관심사로 묶인 관계는 내 관심이 틀어지면 무너질 것이고, 친구 B와의 관계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연락이 끊길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이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유지할 것이냐이다. 내가 신경을 쓰는 만큼 관계는 사슬처럼 튼튼할 것이고 소홀한 만큼 실처럼 얇아져 톡 건드리는 순간 끊어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잡고 있는 줄을 상대방이 잡고 있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친구라고 착각한 관계는 더 최악이다. 내가 잡고 있던 줄을 놓는 반동으로 넘어져 다치기 쉬우니까 말이다.
"인생은 혼자다."라는 말을 들으면 삶이 너무나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하지만 인생이 혼자라면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온 '손님'이이다. 이강백의 희곡 '결혼'에서 주인공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관객에게서 시계와 넥타이 등을 빌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덤'으로 빌려간다고 말한다. 내 곁의 사람도 세상으로부터 빌린 것이며 언젠가 떠나갈 손님인 것이다. 손님이라면 지당 내가 대접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누군가에게 손님으로 대접받을 것이니까.
이렇게 글을 쓰면서 A를 그냥 손님을 대하는 게 서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가라앉았다. 혹은 A가 이미 나에게서 떠난 거라면 화를 내봤자 손님은 내가 화났는지 알지 못한다. 친구를 잘 사귄다는 것은 이 친구와 언제 헤어질지 알며 나도 그 친구를 배웅할 때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