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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Dec 20. 2022

외할아버지 보모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등하원 도우미

등하원 도우미를 할 때 내가 돌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이 반, 어른이 반이었다. 아이들은 놀이터 안쪽에서 뛰어놀고 있고, 보호자로 나온 어른들은 놀이터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벤치에 둘러앉아 있거나 어린 아기들을 따라다니거나 했다. 어른들은 대개 아파트 주민으로, 서로 자주 보는 사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이나 주변 학원들에 대해 정보를 나누곤 했다.


어른들을 둘러보다 보면, 아파트 주민이 아닌 듯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뭔가 풀이 죽은 표정에, 뭔가 소극적인 몸짓이고, 옆 사람과 대화도 안 하고, 놀이터 아이들의 움직임만 쫓아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아주머니. 틀림없이 나 같은 도우미 아주머니였다. 얼굴에 미소만 띠었어도 그저 조용한 성격의 주민으로 보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곤 했었다.


아마 나도 처음엔 아파트 주민의 눈에 그런 아주머니로 보였을 것 같다. 처음 놀이터에 나가 다른 보호자들 사이에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소외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며칠 만에 없어졌다. 내가 돌보던 아이들 중 큰 아이가 워낙 활기차서, 같이 놀던 아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른들 대화란 것이 주로 아이들 얘기였으므로 나도 스스럼없이 다른 보호자들과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여러 개의 놀이터가 있었다. 아이들은 오후에 유치원 버스가 정문 앞에 도착하면 내리자마자 가방을 어른들한테 던지곤 와아, 소리치면서 그날의 놀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아이들의 맨 앞에는 항상 우리 큰 아이와 두 명의 절친이 있었다. 한 명은 우리 큰 아이의 공식 남자 친구였고 다른 아이는 우리 큰 아이의 제일 친한 여자 친구였다. 그날 가는 놀이터는 이들 세 명이 합의하면 정해졌다. 뒤를 따르는 아이들 중에는 같은 나이의 친구들도 있었고 한두 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선두 세 명이 정한 놀이터는 아무리 멀어도, 혹은 언덕을 올라가야 해도 무조건 쫓아갔다.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어린 아이들 뒤로는 보호자인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에 킥보드 하나씩 들고 졸졸 따라갔다. 나도 뒤따르는 어른들 중에 섞여 헥헥거리며 언덕을 오르곤 했다.


"하이고 녀석들, 그냥 저 아래 놀이터에서 놀지."


10여 명의 보호자가 매일 그렇게 만나다 보니 서로 꽤 친해졌었다. 놀이터에 있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집이나 밖에 나갔다 와야 할 때는 다른 어른들이 그 집 아이를 봐줬다. 내가 옆 사람과 떠들다가 우리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에 놀라서 아이를 찾으면 누군가는 꼭 아이의 위치를 알려줬다. 모든 어른이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봤다. 놀이터는 아이들도 굉장히 좋아했지만 나도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놀이터를 향해 선두에서 달려가는 세 아이는 서로 유난히 친했다. 다른 아이들이 없어도 자기들끼리는 잠깐이라도 반드시 함께 놀다가 집에 들어가야 했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작별 인사에만 10분 이상이 걸렸다. 비가 오는 날도 아이들은 차가 별로 없는 지하 주차장에 가서 킥보드를 탔다. 어른 세 명은 주차장 한쪽에 서서 아이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항상 어른들이 먼저 지쳐서 아이들을 강제로 데리고 들어가야 했다.


아이들 덕분에 어른 세 명도 1년 반 동안 수백 일을 함께 만났다. 그래서 나로서는 당시 놀이터 보모 중 이들 두 사람이 가장 친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 중 우리 아이의 여자 절친 외할머니는 나보다 몇 살 젊었었다. 성품이 차분하면서도 활기차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를 결혼 초부터 모셨다는데, 아마 사람이 착해서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 하고는 성격이 맞아서 무슨 얘기를 하든 재미있었다. 둘이 수다를 떠느라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놓치고는 둘이 서로 탓을 하며 깔깔 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친정 엄마와 함께 산다니까 엄마 갖다 주라며 수시로 먹을 걸 챙겨 주곤 했다. 


우리 아이의 공식 남친의 보호자는 아이의 외할아버지였다. 육십 대 후반쯤으로 생각되는 그분은 놀이터 어른들의 대장이었다. 놀이기구 중 어딘가에 못이라도 튀어나와 있으면 바로 관리실에 전화해서 고쳐질 때까지 챙겼다. 사람들은 놀이터에서 뭔가 문제를 발견하면 일단 이 분한테 말했다.


이 분은 놀이터에 나올 때마다 외손주의 킥보드 손잡이에 과자나 간식 봉투를 서너 개씩 매달고 나왔다. 꼬마 약과, 치즈, 젤리, 각종 과자, 떡, 방울토마토 등 매일 종류도 다르고, 분량도 아이들이 서너 개씩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왔다.

벤치에 앉자마자 봉투를 끌러 간식을 쏟아놓고는 놀이터에서 뛰는 아이들을 큰 소리로 불러 모았다. 자기 앞에 아이들을 줄 세운 후 싱글싱글 웃으며 한 명 한 명 입을 벌리게 하고 과자를 넣어주었다. 노는 데 바빠서 할아버지 앞에 오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몇 번이라도 아이를 불러 기여코 오게 했다. 아이가 달려와서 차렷 자세를 하며 '넷'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환하게 웃으며 과자를 아이 손에 쥐어 주거나 입을 벌리게 해서 과일을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가 과일을 싫어하면 호통을 쳐서 꼭 먹게 만들었다. 옆에서는 보호자들이 억지로 과일을 먹는 아이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킥킥 웃곤 했다. 

그날 들고 나온 간식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그랬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부를 때마다 우르르 달려와 줄을 서서 과자를 한 움큼씩 입에 넣고는 와아, 하며 달려 나가서 다시 놀이터를 뛰며 놀았다. 이 분은 아파트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었고, 아이들이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어느 요일 몇 시에 가는지도 꿰고 있었다. 


아이들 간식만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간식도 내왔다. 경기도에서 주말농장을 하고 있다는데 거기서 나온 고구마를 한 소쿠리 쪄 와서 돌린다거나 과일을 어른들도 먹을 만큼 많이 갖고 나왔다. 때로는 쑥떡을 만들어 온 동네에 돌렸다. 떡을 돌릴 때 나한테는 세 덩이를 주곤 했었다. 내가 돌보는 아이들 집에 한 덩이, 아이들 외조부가 사는 집 한 덩이, 거기에 나까지 집에 가서 엄마와 함께 먹으라고 세 꾸러미씩을 주었다.


이 분 하고도 많은 얘기들을 나눴었는데 대부분 손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손주의 습관, 한참 커 가는 남자아이의 먹성, 공부시키는 일 등등. 손주 보는 일은 할머니들도 버거워하는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즐거워하는지 신기했었다. 

"우리 딸이 애 키우기 힘들다고 애를 안 낳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다 키워 줄 테니까 낳으라고 그랬었는데, 그 말한 것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거죠."

물론 그 말 때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딸이 산후조리원에서 나오자마자 첫날부터 손주를 데리고 잤다고 한다. 커서도 평일에는 할아버지와 잤다. 아이는 아침에 깼을 때 할아버지가 옆에 없으면 집안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부터 찾는다고 한다. 엄마 아빠 집이 한 아파트에 있지만 거기 있는 것보다 할아버지와 있는 걸 더 좋아했다. 아마 어떤 할머니보다 더 정성스러운 보모였을 것 같다.


이 할아버지가 아이들 먹일 걸 많이 싸오니까 우리 아이의 여자 절친 외할머니도 한 가방씩 싸오기 시작했다. 다른 집 보호자들도 뭔가를 갖고 나왔다. 할 수없이 나도 아이들 엄마한테 말해서 가끔 초콜릿 과자 등속을 갖고 나왔지만, 아이들 엄마가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나는 대개 빈 손이었다. 항상 그게 마음의 부담이 되었었다.


내가 보던 아이들이 엄마의 직장 때문에 해외로 가야 하는 결정이 났을 때 나는 그동안 우리 아이들이 두 친구들한테 얻어먹은 데 대해 보답도 할 겸, 그리고 아이들에게 추억도 만들어 줄 겸, 두 친구를 내가 돌보던 아이들 집으로 초대했었다. 저녁을 먹였고 아이들은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놀았다. 마침 겨울방학이 시작된 때여서 아이들은 놀이터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친구집에 가게 해 달라고 울었다. 할 수 없이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해외로 나가기 전까지 1주일에 한 번씩 친구 집 놀러 가기 행사를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기절할 것처럼 좋아했고 수많은 사진들을 찍었다.


생각해보면 도우미인 사람으로서, 다른 집 아이들을 초대한 건 내가 너무 오지랖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해외로 간 친구가 그리워서 책상 위에 친구와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매일 한 번씩 쳐다본다고 한다.


이번 크리스마스 즈음, 내가 돌보던 아이들이 한국에 잠깐 나온다고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함께 놀 일정을 짜느라 분주하다. 친구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스케줄을 서로 조정하느라 흥분하고 있다. 내가 돌봤던 큰 아이는 지금 초등 1년생인데, 사진으로 봤을 때는 벌써 사춘기가 된 듯 표정이 의미심장했었다. 직접 보면 얼마나 커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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