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형 열정페이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사회적기업 시니어 인턴
사회적기업에서 시니어 인턴으로 일한 지 2개월이 넘었다. 여기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보겠다는 열정으로 내 딴에는 참 열심히 일했다. 회사에 나가보면 나만 바쁜 것 같고 나만 실적을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의욕이 꺾이지는 않았다. 다른 시니어 인턴들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입사 초기에 회사 대표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인턴 기간 중에도 영업 실적이 있으면 인센티브 지급하나요?"
"어..."
"인턴이라서 지급하지 않는가 봐요?"
"그게 아니라... 실은 제가 시니어 인턴분들한테 실적을 기대한 적이 없어서요, 인센티브는 생각을 못해 봤어요."
"...? 작년에도 시니어 인턴을 뽑았었잖아요."
"그렇죠."
"영업을 아무도 안 했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셈이죠. 앞으로 룰을 한번 고민해 볼게요. 아니, 지급해 드릴게요."
'이상한 나라에 와 있네.'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30년간 광고 영업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영업 실적에 대해 온 신경을 쓰면서 살았다. 실적이 없으면 급여도 없는 환경 속에 살았다. 당시에는 그게 영업의 본질이었다. 낮에는 10여 군데의 광고주 사무실을 돌고 밤에는 술 접대를 하느라 또 일했다. 술에 취해 지하철을 타고, 잠이 드는 바람에 종착역까지 갔다가 택시 타고 집에 올 때도 많았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어도 다음날 아침 출근 시간에는 반드시 회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두 달여간 나는 스스로 노인형 열정페이라며 자조적인 비판을 하면서도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라장터에 나온 정기간행물 입찰 제안서를 쓰고 각 관공서에서 나오는 입찰도 들어갈 만한 게 있는지 매일 뒤졌다. ICT 업계의 한 회사 대표를 인터뷰하고 웹진에 원고를 보냈다. 데드라인에 맞추느라 이틀은 새벽 세시까지 일했다.
2건의 입찰에 참여해 봤는데 성사가 안 됐다. 가만히 앉아 입찰만 들어가자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직접 관공서를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내가 맡은 구에 있는 관공서를 조사하고 수십 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관공서는 대개 친절했다. 메일 주소를 가르쳐 주면서 회사 소개서를 보내라고 했다. 인쇄 일이 있을 때 우리 회사도 꼭 검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인사드리고 싶다는 요청에는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비대면 영업이 답답했다. 얼굴 표정을 보지 못하니 진심을 살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관공서들은 전화를 하지 않고 직접 들어갔다. 처음에는 대개 당황스러워했지만 요즘에는 나처럼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결국에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역시 당장 일을 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그래도 나로서는 메일 하나 보내고 감감무소식인 것보다는 훨씬 일다운 일을 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 연락을 해온 곳은 없다. 이제 시작이니 수주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생각했었다.
두 달여간 바쁘게 일했다지만 젊었을 때처럼 많은 일을 한 건 물론 아니다. 하루 평균 여섯 시간 정도를 회사 일을 하는 데 썼다. 집에서는 엄마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다가 짬을 내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랬다. 어쨌든 나로서는 하루종일 일하며 살았다. 회사 일로만 따져도 인턴 규정상 세 시간만 일하면 되는데 그 배를 했으니 엄청 많이 한 셈이다. 하지만 두 달이 다 가도록 실적이 없어서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근 한 건을 올렸다. 내가 직접 개척한 곳은 아니지만 회사로 연락이 온 곳을 내가 방문함으로써 인쇄 관련 두 건을 땄다. 그런데, 첫 번째 일을 땄으면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데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부가세 포함 총금액은 5백만 원 정도였다. 세 명이 그 두 건을 처리하는데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 전체 납품 기간은 더 길지만 하루 종일 투자한다고 보았을 때 총 투여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말이다. 아직 납품 전이니 그 사이 어떤 문제가 발생해서 시간이 추가될지는 알 수 없다. 5백만 원 매출에서 영업이익을 약 30프로로 본다면 150만 원을 벌자고 세 명이 일주일을 쓰는 셈인데 이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개월 만에 한 건을 땄으면서 이런 이윤이 전부라면 안 하는 게 낫다.
일을 준 곳에서는 앞으로도 자기네 인쇄물은 우리 회사에 맡기겠다고 했지만 물량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올해 안에 두 건 정도 더 있을 것 같다는 말만 들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개척해 가면 매출은 늘 것이다. 하지만 하루종일 열심히 일해야 겨우 중소기업 초봉을 벌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도나마 영업이 될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회사 시스템을 보면 인턴 기간 중에는 월급을 주지만 인턴이 끝나면 영업 수수료로 살아야 한다. 게다가 기본적으로는 자기가 맡은 구에서만 영업이 가능하다. 다른 구의 영업은 그 지역 담당과 이익을 나눠야 한다. 이번에 내가 성사시킨 곳도 앞으로 내 거래처가 될 수는 없다. 본사 담당 구역이기 때문이다.
인턴 이후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도통 즐겁지가 않았다.
한 달 전쯤 시니어 인턴들 전체 회의가 있었다. 거기서 내가 한 물품의 제작 단가와 납품 단가를 물었더니 작년부터 이 회사에 들어와 있던 한 시니어가 짜증을 내면서 그걸 뭐 그리 자세히 알려고 하느냐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수익 룸을 알아야 얼마까지 납품 금액을 낮출 수 있는지 계산이 될 게 아녜요?"
"공무원들은 단가 같은 거 안 따져요. 전체 예산만 맞으면 그냥 진행해요."
"그래도 그렇지..."
"대강의 규모만 알고 있으면 돼요. 지금 제작 단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더 이상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수긍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시시콜콜한 일 얘기를 전체 회의에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올해 이 회사에 들어온 시니어들도 아무도 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혹시 내가 혼자만 열성적으로 일하는 척하는 게 밉살스럽게 보이는 걸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밉살스럽게 보였던 게 아니라 멍청하게 보였던 것 같다.
작년에 시니어 인턴으로 들어왔던 사람들 중 남은 사람은 두 명이다. 두 사람은 현재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맹비 성격의 회비를 내고 있다. 대신 담당 구를 배정받았다. 가끔, 담당 구청에서 일이 나오면 심부름 수준의 납품 대행을 하고 소정의 인센티브를 별도로 받는다고 한다. 문제는, 지난 두 달간 그런 인센티브 건은 단 한 번 있었을 뿐이다. 몇 십만 원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런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 충격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일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생계비가 필요한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전직이 화려하다. 그들은 낮시간에 당당하게 앉아 있을 책상과 명함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르겠다. 회사에 내는 돈도 공유사무실보다 싼 임대료를 내고 있는 셈 치면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생계비를 벌 수 없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이 나이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목표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잃어버린 듯하다니? 그러면, 지난 수십 년간은 목표를 향해 살아왔나?... 아니다. 언젠가는 목표를 향해 가겠지, 하고 희망만 하며 살았다. 항상 그랬다. 당장 코앞의 생계만 해결하고 나면 분명한 목표가 바로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다른 이들은 몇 년 안에 집을 장만하고, 언제까지 자식들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2년 후에는 반드시 전시회를 열겠다고 모두 목표를 세우고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언제나 목표가 없었다. 당장의 비바람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참으로 한심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닥치는 대로 열심히 가고는 있는데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땔감이 없는 느낌이다.
친구가 나에게 요즘 왜 브런치에 글을 안 쓰냐고 핀잔을 줬다. 내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욕이 안나. 글을 쓰면 뭐 하나. 돈도 안 되고, 누굴 위한 자원봉사인지도 모르겠고."
"습작을 해야지."
"누가 내 글을 사 주겠나? 이 나이에 책을 내면 또 뭐 하나.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살기 위해 쓰는 거지. 내 주위에 있는 화가들, 시인들, 예술가들 전부 그래. 다들 살아가기 위해 작품을 해. 다른 이유 없어."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