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생에 한 번 있을 기회
: 내 눈앞에서 사라진 기회
❚가고 싶었던 곳
2000년 초반 우리나라에 그야말로 영어 광풍이 불었다. 나라 전체가 영어 교육에 올인을 한다 싶을 만큼 엄청난 예산을 영어 교육에 쏟아붓던 시대였다. 초, 중, 고 학교마다 원어민 교사를 투입 시키며 영어 교사들의 영어 사용 능력 및 영어 수업 역량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신설되었다. 그런 시대적 요구와 개인적 학구열 덕분에 나는 다양한 영어과 연수를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거의 모든 연수를 다 이수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2014년 내가 근무하던 교육청에서 아주 획기적인 연수를 기획했다. 사상 처음으로 영어 교사를 대상으로 1년간 미국 연수를 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청은 영어 교사 20명을 미국에서 1년간 지내게 하며 그곳의 문화와 언어를 익히고 그 배움을 귀국 후 다양한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확산시키고자 했다. 지금 기억으로 당시 초등 영어 전담 교사 10명, 중등 영어 교사 10명을 선발한 것 같다.
늘 가보고 싶었던 미국을 여행이 아닌 1년간의 현지 생활을 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생활비는 자비로 하지만 미국 대학교 기숙사와 대학교 수업료를 교육청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세세히 경비를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각종 수당이 제외한 본봉 정도의 월급은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수입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어떠한 조건이든 갈 수 있게만 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지원했다.
❚갈 수 있을 것 같은 곳
지원자들 중에 나는 선발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의 연수 성적은 늘 좋았고 공인 영어 성적 역시 좋았기에 내가 선발될 것을 아주 확신했다. 주변 지인과 부모님께도 나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1년만 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올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안심을 시켜 드렸다. 늘 같은 아파트 단지에 가까이 지내던 언니와 동생도 너무 서운해 했다. 지원서를 내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미국에서 지낼 1년을 그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 교사 몇 명에게도 이미 그런 나의 계획을 말해줬다. 다들 내가 선발될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갈려고 애를 썼던 곳
몇 주 후 드디어 대상자가 발표 되었다. 뜻 밖의 결과였다. 초등 영어 교사 10명은 선발되었지만 중등 교사 10명 중 9명이 선발되었고 1명은 아직 공석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원을 했지만 그 9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너무 납득이 되지 않아 교육청에 문의를 했다. 비록 그 한 자리가 비었지만 나는 선발 기준에 미달이란다. 담당 장학사는 둘러둘러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육아 휴직을 그 이전 3년간 한 것 때문에 근무평점이 미제출되어서 선발될 수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아 열심히 키운 게 영어 교사로서 연수에 선발되지 못하는 이유란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분명 성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 휴직하기 전에 분명 나의 근무 평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공문에 명시된 대로 최근 3년간의 근무평점을 어길 수 없다고 한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달이지만 너무 가고 싶은 영어 교사도 한 명 있지만 그들은 그 한 명이 육아 휴직한 여교사라 보내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교육청에 문의를 했으나 그들의 카르텔을 난 뚫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마음 한켠으로 내가 거절된 것이 육아 휴직 전 함께 근무한 영어과 교감에게 미운털이 박혀 근무평점을 낮게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시 영어과 교감은 승진에 혈안이 되어있던 사람으로 영어과 교사들에게 수업 이외에 본인 승진이 도움이 되는 이런 저런 일들을 추가로 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요구에 순응할 이유가 없었기에 수업을 성실히 하는 것 이외에 나머지 것은 거부했다. 그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무평가점수는 인사기밀이라 본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정보라 지금도 확인 할 길이 없다. 아니면 정말 교육청의 설명대로 선발 당시 기준 최근 3년 중 마지막 1년이 육아 휴직으로 인해 근무평점이 없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가지 못하게 된 곳, 그래서 더 가야겠다고 결심한 곳
결국 교육청은 나를 연수에 보내 주지 못 하겠다고 한다. 그러니 별 다른 인맥도 없고 교감한테 미운털 까지 박힌 일개 교사가 무슨 수로 결과를 번복할 수 있으랴. 받아들이기에 너무 불합리한 현실에 힘든 한 달을 보냈지만 결국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부모님과 언니, 동생들은 내심 반기는 기색이었다.
연수 결과가 발표되기 전 내가 선발될 것을 철떡 같이 믿고 매일 같이 미국 생활을 그려보았다. 그러는 동안 미국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더 커졌다. 나의 꿈이 좌초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미국에서의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교육청이 안 보내주면 그냥 내가 내 돈으로 갈 거다'라는 결심을 했다. 결국 첫 번째 꿈이 사라졌지만 나는 다시 플랜 B을 세웠다. 마음의 롤러 코스터를 한 번 거치고 난 이후 남편과 나는 찬찬히 미국으로 가서 생활할 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준비했다.
❚그때 못 간 게 훨씬 더 나았던 곳
그 당시 그 1년 미국 연수에 참가한 사람 중에 지인이 2명 있었다. 내가 유학 후 귀국한 후 우연히 그 분들을 모두 만났다. 지인 중 한 분은 그 1년이 너무 서글펐다고 회고했다. 아주 시골 마을에서 가족도 데려가지 못한 상황이라 텃밭이나 혼자 가꾸며 미국 현지인과는 별 교류를 나누지 못하고 그저 혼자 지내다가 온 기억 뿐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분들은 1년간 한국을 떠날 거라 있던 집도 다 팔았다고 한다. 귀국 후 그들이 팔았던 집은 시가가 엄청 올라 있었고 그들은 재정적 손해도 많이 본 상황이었다. 중고등학생의 자녀를 데려간 또 다른 한 분은 한창 입시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그런 1년을 보내버려 결국 자녀의 대학교 입시 준비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1년의 기간 동안 아이의 영어 실력은 그렇게 좋아지지는 못했다며 그 1년의 미국 생활로 덕을 본 부분이 크게 없다고 했다.
사상 처음 해보는 큰 규모의 해외 사업이라 담당자들의 세세함이 부족해서 현지 미국 생활은 문화 교류나 언어 학습에서 큰 메리트를 주지 못 했다고 한다. 그저 대학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고 대학교 강의 몇 개 듣고 현지인들과 교류는 거의 없이 한인 커뮤너티안에서 생활을 하는 등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것에 비해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 연수는 그해와 그 이듬해를 끝으로 결국 사라졌다고 한다.
그 분들의 1년 국비 유학에 비해 내 돈 들여 간 나의 미국 유학 시절이 그분들의 연수보다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에 공짜로 배우는 것은 없다. 내돈 들여 내가 간 그 유학은 그야말로 인생의 다양한 경험 패키지라 할 만큼 풍성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그분의 1년간의 미국 생활은 단조로운 공허한 시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첫 미국행 티켓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신이 나에게 더 큰 선물을 주기 위함인 것 같다. 그 티켓 대신 신은 나에게 엄청난 대박 선물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