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큼 성큼 다가오는 마흔

: 남이 쫓는 목표 말고 내 삶의 목표

by Hey Soon

❚자기 계발에 진심인 시절

아이가 생기기 전인 신혼 초에 5년간 주말 부부를 했다. 신혼 초에 남편이 근무하는 수원지역에 가서 방학을 딱 한 번 보낸 적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 아이 없이 나 혼자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지겨웠다. 수영도 다니고 혼자 영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남들은 이해를 못 하겠지만 그저 할 일 없이 덩그러니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의 성격에는 만족을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영어 공부가 즐거웠기도 했지만 영어 교사가 되어서 부터 의무감이 더 많이 덧붙여지긴 한 것 같다. 영어 학습자들은 대부분 느끼겠지만 영어는 스킬이다 보니 사용하지 않으면 무디어진다. 마치 연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계속 사용하고 그 감을 잃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영어 교사는 평생 숙제를 떠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 교육은 영어를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TETE: Teaching English Through English)는 움직임이 아주 활발했다. 덕분에 영어 교사에게 주어지는 연수의 혜택이 아주 많았다. 학기 중뿐 아니라 방학 중 연수도 상당히 많았다. 20대 중반에 교사가 된 후부터 나는 왠만한 영어 교사 연수는 거의 다 신청을 할 만큼 배움에 진심이었다. 아이 엄마가 되기 전 6년가량 거의 매 학기 매 방학마다 쉬지 않고 연수를 받으러 다닌 것 같다.


❚남편의 퇴직과 다시 시작한 신혼 생활

방학이라도 남편이 사는 곳에 가지 않고 영어 연수를 열심히 쫓아 다니며 소위 자기 계발에 전념했다. 그 즘 나는 도저히 주말 부부를 계속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주말마다 기차로 3시간을 타고 가서 일요일 저녁에 다시 내려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언제나 그 생활이 끝날지 모른채 그저 기약 없이 소모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남편에게 전업을 제안했다. 잦은 해외 출장으로 남편의 건강도 염려가 되었다. 본인이 하는 업종으로 내가 사는 도시로 이직해오는 방법도 있었을 법했지만 여의치 못 해 결국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일단 내가 사는 도시로 내려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과감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당시 친정엄마는 남편을 하루아침에 백수로 만든 나의 결정에 야단을 많이 치셨다. 하지만 그때 과감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부부는 아마 부부의 인연을 계속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도 여전히 친정 동생들과 자취방에 사는 삶을 드디어 청산하고 남편과 신혼살림을 차려 분가했다. 결혼한 지 3년째 겨우 우리는 남들처럼 평일 아침과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새로운 도시로 전입해온 남편은 나름 새로운 일을 시도하느라 분주했고 나 역시 여전히 영어 교사로서 배우고 싶은 연수를 열심히도 배우러 다녔다. 비록 남편을 알고 지낸 지 10년이 다 되어갈 즘이었지만 물리적인 공간을 함께 하며 처음으로 실제 부부처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천성이 참 많이 다른데다가 늦게 자는 남편과 일찍 일어나는 나의 라이프 스타일은 생활의 여러 곳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혼까지 생각할 만큼 너무 다른 사람과 함께 평생을 살 자신이 서지 않았다. 함께 생활하면서 더더욱 부부의 연을 계속하고 살아야 할지 근본적 회의가 생겼다. 진지하게 이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결정을 내려 되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 같아, 잠시 차분함을 찾기로 했다.


그 당시 내가 선택한 것은 별거였다. 그 당시 영어과 연수 중에 전국 영어 교사를 대상으로 6개월간 합숙으로 진행하는 연수가 있었다. 물론 선발형 연수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받은 연수 이력과 토익 성적 덕분에 다행히 선발되었다. 나는 남편에게 나의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고 그저 그 연수를 꼭 듣고 싶다고만 했다. 배움을 즐기는 편이라는 걸 남편은 알고 있었기에 남편은 흔쾌히 내 계획에 찬성했다. 결국 나는 비공식적 별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혼의 위기 극복

6개월 영어 연수는 나의 인생에 아주 소중한 전환점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영어 선생님과 숙식을 같이하며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나로서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영어를 공부하고 다양한 지역의 선생님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황금기라 할 만큼 행복했다. 그 6개월간 나는 마음의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그 사이 마음 한 켠으로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도 커져갔다. 다시 새롭게 그 사람을 바라볼 준비를 하게 되었다.


6개월 연수 중 마지막 한 달은 해외 연수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서 한달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 남편은 남편대로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한 달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던 날 남편은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음의 차분함과 평온함을 다시 찾고 결국 나는 다시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서도 계속 함께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다행히 두 아이가 생겼고 남들처럼 두 아이를 돌보느라 세상을 거의 등지다시피 하며 살았다.


❚육아 휴직, 견뎌야 하는 시간

육아 휴직 초반 학교가 아닌 내 집에서 아이와 맞이하는 평일 오전의 그 여유로움이 참 좋았다. 하지만 육아 휴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마냥 뒹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는 못 했다. 아이에게 대단한 작정을 하듯 매일 두 세시간 영어책을 읽어 준 것은 어쩌면 영어 교사로 최소한의 감을 잃지 않으려는 나의 직업적 책무감일 지도 모른다. 비록 아이에게 영어 책 읽어주기를 즐기기는 했지만 그 세월이 나에게 “아이와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라고 회고할 만큼은 되지 못 했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 시간이 거의 없이 그저 아이와집안일에 다 바쳐져야 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30대 중반까지는 정말 육아에 파묻혀 살았다.


❚불면증

갑갑한 일상이 결국 불면증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만 기댈 곳이 있으면 3분 안에 잠이 들어 버리는 잠순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잠에 관한 한 참 복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육아 휴직 2년째부터 불면증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불면증을 가지게 되면서 매일 밤이 괴로웠다. 잠이 주는 행복마저 빼앗긴 육아 휴직 기간은 그저 인고의 세월이었다.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 복직을 했다. 다행히 2년 가량 이어진 불면증은 복직 첫날밤 정말 마법처럼 사라졌다. 학교 복직 후 나의 삶의 활력도 예전처럼 돌아왔다. 비록 퇴근 후 육아를 해야 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영어 교사로 보람과 즐거움을 한껏 느끼던 시절이라 학교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배움에 열심

복직을 한 나는 다시 배움에 열심인 모드로 들어갔다. 영어과 관련 연수, 특히 방학 중에 하는 연수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다. 당시만 해도 친정 엄마의 건강이 나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괜찮아지셔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친정 엄마는 우리 남편을 참 편하게 대하셨다. 엄마는 애초에 나의 결혼에 반대를 많이 하셨다. 하지만 어른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남편의 온유한 성격으로 친정 엄마와 남편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사위 네 명 중 엄마는 남편을 제일 편하게 생각하고 자주 우리 집에서 식사도 함께 하시며 아이들을 잘 돌봐주셨다. 친정 엄마의 지원 덕분에 나는 배움에 열심인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남이 쫓는 목표 말고 내 삶의 목표

1996년 캐나다로 한 달 어학 연수를 갔던 20대 초반, 여느 대학생들처럼 유학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유학에 대한 꿈은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 형편으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꿈은 그저 막연히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보고자 하는 단순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리고 결혼과 육아의 10년을 살고 문득 30대 후반이 되던 2014년이었다. 그 당시 여름 방학, 겨울 방학에 시리즈로 이어지는 영어 교육자 양성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 연수는 모든 영어과 연수의 가장 상위 단계의 것으로 다른 영어 교사를 코칭 할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이다 보니 연수를 책임지는 강사도 영어 교육 분야에 전문 지식과 티칭 스킬이 아주 특화된 분이셨다. 한 분은 캐나다에서 나머지 한 분은 우크라이나에서 오신 분이셨다. 학기 중에는 각자의 본국에서 비대면으로 연수를 운영했고 여름 한 달, 겨울 한 달은 우리나라로 직접 오셔서 대면 연수를 하셨다.


10년간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은 말 그대로 집, 학교, 집, 학교 했다. 그런 나의 10년간 삶의 반경에 비하면 그 분들의 삶의 무대는 참 넓어 보였다. 너무 부러웠다. 나와 그들의 인생은 너무 다르게 여겨졌다. 현실에 갇혀 예전의 꿈도 다 사라진 내 처지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영어 교사 교육자과정을 끝으로 이제 영어교사로서 받을 연수도 거의 다 이수한 상황이라 웬만한 연수는 별로 새롭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교사로서 품을 수 있는 목표는 승진 이외에 달리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승진이라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남이 쫓는 목표 말고 내 삶의 목표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내 나이는 이미 마흔에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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