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감정 노동자

: 무의미하게 타들어 가고 있는 내 인생의 양초

by Hey Soon

❚2014년, 끔찍한 해

2000년을 기점으로 학교는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교사가 된 즘부터 학교는 더 이상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 곳으로 바뀌었다. 학생의 인권이라는 명목하에 교사 주도권의 상당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말썽쟁이 녀석들을 잠시 뒤에 가서 서 있게 하는 것이나 복도에 잠시 내보내는 일들은 이제 더 이상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회 뉴스 면에서 교사에게 신체적 정신적 해를 끼치는 학생들의 철부지 행동들이 자주 보도되곤 했다. 체벌이 사라진 학교에서 더 이상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적합한 대안은 없었다. 그 이후 몇 해 동안은 상벌점제라는 제도를 시행하며 나름 교육적 대안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 학생의 인권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내가 근무하는 지역에는 소위 경합지와 비경합지가 존재한다. 경합지는 교사들이 근무하기를 선호하는 학교들인데, 대체로 학생들이 온순하고 경제적 여건이 양호한 지역의 학교가 여기에 속한다. 반면 비경합지는 학생들의 가정 형편이 어렵고 편부와 편모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학생들의 기본 생활 태도와 학습적 능력이 좋지 않은 학생의 비율이 높은 학교들이 여기에 속한다. 첫 두 학교를 소위 경합지에서 근무를 한 후 세 번째 학교는 비경합지로 발령이 났다.

둘째를 낳아 3년간 육아 휴직 후 복직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병행하는 것에 다소 피로를 느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학교에서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재미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비경합지로 꼽히는 학교로 발령이 났다. 새로 옮겨간 학교 학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편부, 편모인 상황이었다. 아이들의 학습 동기는 아주 저조했다. 특히 영어를 좋아하는 학생의 비율은 아주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의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들의 순수함 때문이었다. 특히 첫 이년은 남학생반 담임을 하면서 장난기는 많지만 그래도 서로의 마음을 잘 챙겨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듬해 교직 평생 처음으로 여학생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것도 중2병의 최절정을 달리고 있는 여학생반을 맡았다. 당시 내 딸도 아직 초등 저학년이라 나에게 사춘기 여학생의 심리를 헤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제일 반항기가 높은 여학생이 있었다.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여동생은 엄마와 살고 이 아이는 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았다. 담배를 피고 밤새 동네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야 말로 인생의 최대 반항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었다. 작은 체구와 뽀얗게 화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그 여학생은 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3월 첫 한 달간 그 아이는 나에게 아주 살갑게 대했다. 나 역시 그 아이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을 담아 지도했다. 하지만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아이의 품행은 점차 이상해져갔다. 무단 결석이 잦고 교내 흡연 및 수업 중 욕설과 같은 행동 때문에 담임인 나는 더 이상 말랑말랑한 역할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그 아이는 거칠어져 갔고 급기야 내 면전에 대고 욕설까지 했다. 그 날도 그 아이의 품행 때문에 지도를 하고 있었다. 교무실이 아닌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에 나를 도와줄 동료 교사도 없이 나는 그 철부지 반항아와 독대를 하며 그 수모를 혼자 감당했어야 했다. 물론 교무실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을 누가 대신 수습해줄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내 편을 들어 몇 마디를 거들어 줄 동료는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교사 생활 10여년 만에 그런 수모는 처음이라 온몸이 벌벌 떨릴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학교에 알린다고 한들 학교가 그 아이를 제대로 훈계하고 교육할 기제도 없다. 그저 아이 지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교사의 잘못이라 여겨질 수도 있기에 나는 학교에 이 일을 이슈화 하지도 못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아이와 직접적인 대면을 회피했고 그 아이는 학교에 무단 결석을 하거나 수업 내내 업드려 자는 등 대놓고 수업을 거부했다.


❚교직에 대한 회의감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가 되는 교권의 부재는 그 당시에도 그러했다. 교장, 교감은 교권이 묵살되는 상황에서도 결코 교사 편을 들지 않고 그저 문제의 책임을 묻기를 먼저 한다. 동료 교사에게 하소연을 하더라고 해결책은 없고 왠지 내가 대응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자책까지 들기도 했다. 그저 그 운이 없는 한 해를 내가 감내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지 그 무엇도 내가 바꿀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교직에 대한 강한 회의감이 들었다.


영어가 좋아 영어를 즐겨 공부했고 나의 배움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영어 교사라는 직업이 참 좋았다. 하지만 새롭게 부임한 그 학교의 상황에서는 나의 영어 교사로서의 역량은 도무지 쓰일 부분이 없었다. 그저 보육교사라는 느낌 마저 들었다. 온순하게 보이던 학생들이 사납게 변하는 날이면 나는 보육교사는커녕 그들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특히 문제의 그 여학생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 갔고 그 아이의 아버지도 자기 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없다고 하소연 해오기도 했다.


❚교장의 일방적인 지시

당시 우리나라 교육은 수월성 교육이라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교육청은 수학과 영어 과목의 우열반 운영을 각 학교에게 거의 강제 하다시피 했다. 얼핏 보면 참 좋은 생각 같다. 각자 능력에 맡는 과제를 부여해서 각자 능력에 맞게 설정한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게 하여 학습 효과를 최대화한다는 취지이다. 이런 기본 취지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학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우열반의 실행은 예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반마다 눈에 띄는 품행장애 아이가 있는 학교의 경우, 열반 수업은 교사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현실상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로 부정적 기운을 뿜어내며 아이들은 나날이 무기력해지고 교사의 열의는 차츰 사라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학교장에게 토로한들 교육청의 일방적인 지시와 교장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10년 선배 선생님과 같이 중3 영어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교장에게 찾아가서 현실적 고충과 학습적 효과를 최대한 고려했을 때 우열반이 아닌 일반반 운영이 우리 학교에는 더 효과적이라고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장은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교사의 전문성이 인정되지 않는 교육 현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 그 당시는 더욱 그러했다.


❚내 인생의 양초

학생들의 무기력과 품행장애는 영어 교사로의 내 역할에 큰 회의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학생들의 횡포가 심한 날은 그저 감정 노동자로서 하루를 보낼 뿐이지 교육자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2014년 그해는 더욱 그랬다. 30대 후반의 내 나이로 그런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듬어 안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내 인생의 양초가 그런 아이들에 의해 낭비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소중한 하루가 그렇게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 치가 떨렸다. 그래서 정말이지 벗어나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살기 위해 그곳을 잠시 벗어나야겠다는 절박함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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