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생과 사의 문턱

: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by Hey Soon

❚엄마의 우울증

얼핏 생각해보면 엄마의 환한 표정을 자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어른이 되면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엄마의 눈빛은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든 적이 많았다. 난 그게 엄마의 불안한 마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말수가 적은 엄마라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둘째를 낳아서 육아 휴직을 할 무렵부터 우울증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유학을 가고 싶어진 시기는 엄마의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의 우울감은 젊은 시절에도 그랬다고 한다.


평생 성실하게 사시고, 자식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으시고 누구보다 자식 교육에 애쓰신 엄마였다. 우리 다섯 남매는 모두 결혼하고 어엿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언니를 제외하고 딸 셋은 모두 교사고 남동생은 공무원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 자식 교육은 참 잘 시켰다고 부러워하셨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느 날부터 엄마에게 찾아든 삶의 공허함과 무기력증, 우울감은 엄마는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2008년 엄마는 아빠 몰래 자살 시도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우리 엄마가 그런 무모한 시도까지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행히 엄마는 갈비뼈 골절만 입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그 사고 현장에 가기가 두려웠다.


그 일이 있고부터 엄마는 두문불출하며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말도 한마디 없이 그저 화가 난 사람의 표정을 하며 하루 종일 집에 누워만 계셨다. 우리가 찾아가도 그저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딸들이 곁에 가까이 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뭐가 우리 엄마를 그런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는지 지금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


결국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마를 강제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켰다. 첫 한 주는 거의 하루 종일 수면 상태였다. 오랜 불면증으로 심신이 지쳐있던 엄마는 그 한 주간의 수면으로 몸의 기운을 많이 회복하셨다. 다행히 그 당시 같은 병실의 환자들 가운데 엄마와 연배가 비슷한 분들도 계셔서 엄마의 회복은 눈에 띌 만큼 빨랐다. 한 달의 입원 생활을 한 후 엄마는 예전의 웃음을 되찾았고 손자, 손녀의 재롱을 받아 줄 만큼 건강하게 되었다.


❚ 깊은 수렁

그러다 다시 엄마는 조금씩 처방해준 약을 끊으려 하셨다. 중독에 대한 우려를 하신 듯 했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병세가 다시 또 깊어졌다. 엄마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년간 엄마의 병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결국 엄마는 두 번째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입원때와는 달리 엄마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첫 입원은 60대 중반이었지만 그 사이 거의 6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탓에 엄마의 기력은 많이 쇠했고 엄마의 의지력도 하루하루 약해져만 갔다. 엄마는 퇴원을 고집했고 다시 칩거 생활을 하며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집에서 머물러 계셨다.


6년간의 우울증을 뒷바라지하던 아빠도 많이 지치셨다. 저녁이면 그런 엄마를 홀로 두고 아빠는 술을 마시러 나가버리곤 하셨다. 그럴 때면 근처에 사는 나와 언니는 번갈아 가며 엄마를 집으로 데려와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하지만 마지막 몇 달은 그마저도 마다하시고 엄마는 아빠가 없는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아직 유치원생이고 초등 저학년의 아이를 집에 두고 엄마에게로 저녁마다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날마다 병세가 깊어지는 엄마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자꾸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엄마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누구도 엄마를 구해 낼 밧줄이나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 닮아서 무서웠고 그래서 다르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자매 중에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다. 평생 성실 하나로 사시던 분이셨는데 삶에 대한 회의를 통째 안으시고 엄마는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그래서 난 더 두려웠다. '언젠가 나도 엄마처럼 삶의 동력을 잃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내가 오늘 하루 살고 내일 하루 살고 그리고 또 그 다음 날을 살고, 살다 살다 세월이 흐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긴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 스스로 무거운 마음의 짐을 쌓아가고 있었고, 삶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난 더더욱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당신보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온 엄마를 바라보며, 그 딸이 이제 다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자식에게 온전히 내 삶의 의미를 두고 싶진 않았다. 엄마가 살면서 찾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에 나가서라도 그 무언가를 찾아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년이 보장된 영어 교사였고, 해외 박사 학위가 있다고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굳이 고생스럽게 해외 유학을 다녀온다 해도 내 위치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감정의 노동자로 살다가 나의 에너지를 다 소진 하고 허망한 노후를 맞이하는 건 아닐까? 삶의 의미를 찾지도 못 한 채 나의 양초가 다 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난 두려웠다. 나는 매일의 반복되는 그 갇힌 공간에서 내 감정 따위는 묵살되는 그 시간들을 참아낼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이라는 그 타이틀을 의지하며 평생 갇힌 공간에서 그렇게 매일 숨만 쉬고 양초를 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도전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하며 삶을 허망하게 마감하긴 싫었다. 차라리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제한된 교사 생활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다른 세상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지울 수 없는 죄의식

우리 두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직장맘인 나의 육아 부담을 대신 떠안으셨다. 나는 엄마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딸이었다. 자라면서 엄마를 많이 힘들게 한 자식도 나였다. 중학교 2학년에 들어서서 대도시로 전학 보내달라고, 떼를 써서 기어코 부모를 떠나 타지로 전학을 강행한 것도 나였다. 엄마는 나의 고집을 뒷감당을 하시느라 물심 양면으로 엄청 고생하셨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 누구보다 좌충우돌 삶의 큰 파도에 허우적거렸던 것도 우리 집에선 나 뿐이였다. 그야말로 나는 미친 존재감의 딸이었다. 속마음은 아주 여리지만 '하고잽이'였고, 고집불통의 딸이었다.


그런 딸이 엄마가 많이 아픈 걸 알고도 머나먼 땅으로 도망갈 궁리를 한다고 하면 누구든 나를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았다. '나 말고도 엄마 곁을 지킬 언니와 두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있으니,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었지만, 스스로 드는 죄의식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엄마 몰래, 엄마를 떠날 궁리를 한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천국에서조차 서운함을 느끼고 계실 것 같다. 결국,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차마 엄마에게 나의 은밀한 계획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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