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흔에 비싼 고생 충동구매

: 엄청난 그러나 순식간에 내린 결정

by Hey Soon


❚마흔이 주는 조급함

서른이 되기 직전이던 해의 마지막 날 늦은 밤이 다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첫 아이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이 보내다 나도 모르게 서른은 불쑥 내 앞에 와 버렸다. 해질녘의 스산함같은 감정과 청춘이라는 잔치가 끝난 듯 한 씁슬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 이후로도 시간은 변함없이 예정된 대로 흘렀고 나는 그 서른에다가 10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태어 어느덧 마흔에 접어들었다. 40년의 세월을 살아내면서 주어진 삶의 과업을 하나하나 해내느라 꽤 열심이었다. 학업에 몰두했었고, 취업했고, 배우자를 만났고, 두 아이를 키웠다. 그리고 매일 아내로, 딸로, 엄마로, 교사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고 새털처럼 많은 날 이었다. 그래서 10년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별 의미 없는 시간 뭉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마흔은 단지 물리적인 10년의 추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유한함을 피부로 절실히 깨닫게 만든 세월이었다. 지난 10년이 흘러갔듯 앞으로 10년도 흐지부지 일상의 쳇바퀴에 갇혀 또 그렇게 흘려보낼 것 같았다. ‘그렇게 10년, 10년, 또 10년의 세월이 가고 나면 나의 삶도 곧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삶에 대한 물음

정말 정신없이 살아온 삶이었지만 마흔이 되는 즘 ‘어쩌면 내가 인생의 절반을 다 소모했을 수도 있고 절반 이상을 이미 소진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그런 매일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세상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가 하루 아침에 삶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걸 본 후 나의 질문은 더욱 절실했다. 삶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늘 반복되는, 나의 역할이 부여하는 임무를 다 해내느라 허덕이던 나의 일상은 도무지 그 해답을 줄 리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치열한 일상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하기는 커녕 의문만 증폭시켰다.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주변을 바꾸고 다른 삶의 경험을 하고 싶었다. 다른 역할로 살아 보고 싶었다. 사회가 부여하는 그 역할 말고 나 스스로 부여한 나의 역할을 오롯이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유학을 결심하면서 그것이 나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나를 만들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엄마는 삶의 희망을 거의 놓아 버리신 상태였다. 두 아이는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남편의 개인 사업은 이제 겨우 기반을 잡아가고있는 상태 였다. 연로하신 시부모님은 매주 손주들의 방문이 삶의 낙이셨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 언제가 가장 최선의 시간일까?


조금만 더 여기서 꾸물거려 줘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좋은 시기일까? 하지만 언제든 내 주변에는 나를 꾸물거리게 만들 일들로 가득하다. 세월이 흐르면 부모님들은 더욱 연로해지실 것이고 그런 부모를 두고 떠나기엔 더욱 부담될 게 뻔하다. 그리고 나 역시 나이를 한 해 두 해 먹어가면서 삶의 동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의 무의미함을 그저 받아들이며 세월을 무심히 살아갈지도 모른다.


❚기어코 직접 살아 보고 느껴보기로

난 더 늦기 전에 몸무림 치고 싶었다. 바깥 세상이 험난해도 나는 기어코 나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가 살아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고, 다시 열정적으로 살아 보고 싶었다. 영어 교사 6년 차 무렵, 운 좋게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부설 어학원에서 진행되는 한 달간 영어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잔뜩 기대한 나는 도착한 지 하루 만에 크게 실망했다. 말이 좋아 샌디에고 주립대학교이지 그 어학원이라는 곳은 대학 캠퍼스 귀퉁이에 위치 했고 현지 대학생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었다. 나는 자존심마저 상했고, 그 대학교 중심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강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10년의 육아에 온전히 몰입하느라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하지만 교사 생활의 고단함과 삶에 대한 의구심으로 매일을 그저 살아내듯 보내면서 그 예전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한 중심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스멀스멀 내 몸을 감쌌다. 나도 그들과 함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구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잠자던 나의 호기심과 잃어가고 있던 배움의 욕구가 다시 솟구쳤다. 평생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그때까지 영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영어로 이메일을 쓴 적도 없었다. 나는 영어를 의미 있게 "사용"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 경험하고 싶었다. 


❚세상 구경을 금수저만 하라는 법 있나?

교육청에서 보내주는 일년 미국 해외 연수 선발에서 낙제를 하고 실망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저녁 늦은 밤 까지 나는 남편에게 나의 잊혀진 꿈을 말해주었다.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던 미국 대학교 중심부에서 배움의 욕구를 채우고 싶은 나의 꿈. 남편과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일찌감치 딴 나라 구경씩이나 한 터였다. 먼 옛날 나는 캐나다 배낭여행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배경 탓에 우리는 다른 언어권에서 살아 보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남편은 다시금 그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의 꿈을 지지해주었다.


내 꿈도 꿈이지만 우리의 결심의 근원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세상 경험을 많이 시켜주고 싶은 우리의 소망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재산을 불리거나 많은 유산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마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세상 경험을 많이 시켜주고 싶어하는 마음 만큼은 어느 부부보다 컸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성격도 성향도 참 반대다. 하지만 삶의 가치관이나 아이들의 교육관은 서로 참 비슷하다. 우리는 곤히 자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며 결심했다. 그 당시 내 나이는 마흔이었다. 더 이상 미루고, 주저할 수 없는 나이였다. 교사로 지낸 16년간 감정 노동자의 임금을 다 비치고서라도 나는 세상 경험을 사고 싶었고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남편은 그런 나의 뜻을 지지해주었다.


❚고생을 사기로 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애쓰시던 친정엄마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가신 후, 나는 그 빈자리에 서서 마냥 서러워만 할 수 없었다. 대신, 난 세상 구경을 하러 나서기로 했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꿈틀거렸다. 마흔에 두 아이와 남편을 다 데리고 유학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나는 참 대단했다. 하지만 남편의 결심은 더 대단했다. 나보다 6살 많은 남편은 당시 46세였고 집안의 가장으로 다른 나라에 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었다. 남편은 철없는 부인을 만류하기는커녕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새롭게 오픈한 학원을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다시피 하고 우리는 떠날 결심을 했다. 철없는 부부처럼 세세한 재정적 계산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무모할 만큼 대단한 결심을 해버렸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어? 지금이 언제고 최선의 시간이다. 그일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실행하기에 최선의 시간은 언제든 지금이다. 행동력과 결단력이 다소 강한 나는 결국 남편과의 며칠 의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모두 다 떠나기로 했다. 결국, 우리는 사서 고생을 하러 가기로 했다.되돌아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렇게 저렇게 재어보고 계산해보고 하며 시간을 보냈으면 결국 우리는 떠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경제 개념이 발달하지 못 한 덕분에 무모할 만큼 엄청난 결정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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