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른 새벽, 뉴욕 그리고 수능시험장
: 당당한 네가 멋지다
❚이른 새벽, 뉴욕으로
2016년 겨울 이른 새벽 우리 네 식구는 밴에 몸을 실었다. 새벽이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온 동네는 이미 멋진 파티장을 연상케 했다. 미국에 거주한 지 1년 만에 우리 식구는 세계적인 도시, 뉴욕으로 크리스마스 기념 가족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가 아닌 차로 가는 여행이다. 우리가 살던 집에서 뉴욕까지 쉬지 않고 달리면 16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나와 남편은 번갈아 가며 운전대를 잡았다. 어슴프레한 새벽, 비몽사몽간에 아이들은 밴에 올라탔다. 아직 잠이 덜 깬 초5, 초2 두 꼬마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미국에 산 지 1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신기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던 우리가 늘 하는 일상은 그저 바로 옆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기가 전부였다. 그런 두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에 와서 산다는 사실에 늘 나 스스로 놀란다. 이렇게 여행을 하며 이색적인 정경을 우리 아이들과 바라볼 때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아이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그저 아파트 주위를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딴 나라, 먼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그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지금도 아이들의 그 마음들이 궁금하다. 하지만 참으로 과묵한 두 아이라 그저 추측할 뿐이다.
❚이른 새벽, 대입 수능 시험장으로
2023년 초겨울, 이른 새벽 아들을 제외하고 우리 세 식구는 뉴욕갈 때 탄 똑같은 밴에 몸을 실었다. 이른 새벽이기도 하거니와 대입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이라 대부분 사람들의 출근, 등교 시간이 뒤로 밀리는 특별한 날이라 아파트에 불이 켜진 집도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한국으로 귀국한 지 3년 만에 우리 딸은 수능 시험을 치러야 했다. 배정을 받은 곳은 우리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어슴프레한 새벽, 우리 고3 딸은 밴에 올라탔다. 딸은 수험표를 챙긴 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매일 등교시간에 하듯 오늘도 소리내어 딸을 위한 기도를 했고 딸도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듣고 있었다.
잠시 차분함이 차에 감돌았다. 그 사이 불안한 마음이 혹여나 들세라 남편은 ‘라떼는 말이야’ 토크를 시작한다.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덧 우리는 시험장에 도착했다. 경찰이 나와서 도로 교통을 정리하고 따뜻한 차를 건네는 분들도 보였다. 딸은 시험장에 1시간 가량 일찍 도착해서 차분히 시험 준비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계획한대로 우리는 시험장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남편은 차에서 내려 딸을 안아주고 딸을 드려 보냈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고 후다닥 출근을 했다. 고3 수험생 엄마 노릇을 잘 못한 탓 일까, 이런 저런 미안함에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속까지 쓰려 그 좋아하던 커피 한잔도 마시지 못하고 시험이 끝나는 오후까지 계속 시계만 바라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대형 바이킹
지난 8년간 딸은 전혀 다른 두 곳에 적응이라는 것을 강요 당했다.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있다는 그 한 마디에 꼬여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탄 딸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5년간의 미국 생활은 초5학년이던 딸에게는 엄청난 삶의 변화를 안겨 주었다.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딸 아이는 이제 왠만한 영어 듣기 시험은 자신있게 만점을 맞을 만큼 단련이 되었다.
수능이라는 숨막히는 입시의 존재도 알지 못한 채 딸은 미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수능처럼 과열 경쟁은 없었지만 그곳에서의 학업도 녹녹하지는 않았다. 언어 장벽이 떡하니 가로막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딸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느리지만 앞으로 걸어갔다.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던 그곳에서 남과의 경쟁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시간 안에 암기한 지식을 되내이는 재바름이나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내는 스킬 단련을 하기 보다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발표를 하는 지식의 생산과 관련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수업은 학교 수업이 전부이고 집에 와서는 숙제나 간단한 퀴즈에 대비한 공부가 다였다. 그리고 주일에는 선데이 스쿨에서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학교 생활과 삶에 적응을 할 즘,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을 결정했다. 아이를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지만 귀국 후 아이가 해야 할 적응의 사이즈는 언어 장벽이 있던 미국에서의 적응 만큼 이나 쉽지 않았다. 이곳에는 언어 이외에 나머지 모든 것이 미국과 달랐다. 당장 중3 2학기로 재입학을 했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학생들은 이미 마음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한창 준비하고 있던 중 이었다. 부모의 무지로 딸은 선행에 선행을 거듭한 학생들이나 선발될 법한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딸은 거의 경쟁할 수 없을 만큼 같은 반 급우들과 학력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져 있던 상태였다.
❚당당한 네가 멋지다.
힘든 첫 학기의 고비를 미련스레 인고한 후 딸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우려한 바대로 딸은 밤 9시까지 하는 야간자습을 결국 할 수 없다고 입장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다행히 그 해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딸은 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고2에는 그런 딸도 서서히 적응을 하고 고2, 고3 동안은 밤 10시까지 친구들과 같이 야간 자습에 참여했다. 급기야 딸은 고2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성적 향상상까지 받아왔다. 학교 생활에서 딸은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계속 앞으로 가고 있었다.
하루는 딸을 차로 등교시키고 있는 데 교환학생 혼자 걸어가는 게 보였다.
“너도 미국 있을 때 저 친구처럼 유일한 외국인이었잖아.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 내가 딸에게 물었다.
“별 다른 느낌 안들었는데.” 역시나 무던한 딸답게 대답했다.
우연히 딸의 인스타그램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케이팝에 심취해 있던 딸은 무슨 꿍꿍이인지 집 앞 강변 둔치에서 케이팝 춤을 추며 셀프 동영상을 만들었다. 주위 사람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저 혼자 음악에 맞춰 1분 가량의 짧은 영상을 찍은 듯 했다. 나도 남편도 그런 뻔치는 없는 사람이다. 남들을 의식하느라 바쁘다면 바쁜 스타일이다. 집에서는 과묵한 딸이라그렇게 대담하게 영상을 촬영했다는 사실은 너무 의외였다.
딸은 미국에서 살면서 남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가지기 보다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지 모른다. 애초에 남과 다른 처지이다 보니,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한 의식을 크게 하지 않고 살았던 모양이다.
❚딸에게 전하는 편지
우리 딸,
엄마가 미안했다.
스케일 큰 바이킹을
니 허락도 없이, 너의 이해를 구하지도 않고
어느날 갑지기 너를 태워서.
바이킹을 타면서
엄마는 참 많이도 안절부절 못 했단다.
내가 상상한 이상으로 바이킹의 스윙이 컸기에
나는 그저 눈을 질끔 감고 버티기만 했어.
너는 용감하게 눈을 뜨고
이리저리 주위를 봤구나.
그 출렁거리는 바이킹을 타면서도
너는 크고 있었고
너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구나.
지난 8년간
큰 바이킹을 타며
당당함, 의연함, 대담함, 그리고 신념이
니안에 자라고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