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함 그 너머에
❚학부모와 교사의 두터운 신뢰심
우리 아이를 위해 나에게 그 시험지를 미리 건네준 것은 학교가 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나또한 학교를 신뢰했기에 우리 아이의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학교를 보냈고 학교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여러 가지 자원 봉사 일도 했었다. 학교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였다. 그 교회 소속 사립학교는 독자적인 교육의 자율성을 부여받기 위해 미국 연방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 학교의 존립은 순전히 학교와 학부모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그 둘 관계는 아주 긴밀하다. 학교 재정에 대해 학부모와 학교 서로가 함께 의논하고 해결해 나갔다. 다양한 학교 이벤트에는 언제나 학교 기금마련을 위한 모금행사가 있었고 여기에 학부모와 학교 모두 발 벗고 나섰다. 그런 재정적 공동체 의식 위에 깊은 신앙심이 에워싼 상황이니, 부모는 학교에 학교는 부모에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학부모가 일방적으로 학생의 편에 서서 학교를 상대로 항의하는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서로를 믿고 항상 배려하는 편이었다.
❚상식을 넘어버린 대한민국 입시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상식을 벗어나기 일쑤이다. 비록 모든 수험생의 가방을 교실 앞 쪽에 두었더라도 그 안에 폰이 울릴 경우, 수험생은 ‘시험규정 위배’라는 이유로 0점 처리가 된다. 그 수험생이 그 울리는 폰을 이용해서 부정행위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제로이다. 그럼에도 부정행위의 이유로 0점 처리 되는 이 상황은 참 안타깝다. 공평함, 공정함, 정의로움이라는 미명하에 그 하루의 시험을 위해 많은 날들을 애썼던 그 수험생의 노력은 허사가 되어 버린다. 먼 동네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을 땐 별 생각이 없을 테지만 나와 관련된 어떤 아이의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 0점 처리의 규정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있는 나로서는 이런 일들을 목격할 때마다 과연 교육의 본질은 무언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그저 공평함만 따질 뿐 그것이 불공정한 처사이고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전혀 게의치 않는 집단 이성의 마비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교직은 전문가가 아닌 그저 서비스업
우리나라의 교권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대한민국 교사로 근무하다가 잠시 미국의 사립학교 학부모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교사와 학부모간 두터운 신뢰심에 대한 부러움은 남달랐다. 그리고 그 신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슬픈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의 학교는 그저 줄을 세워주는 기관으로 전락한 것 같다. 누군가가 우리 학교에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미션 하나만을 부여한 듯 하다. 그러니 당연 학부모와 학생은 한편으로 똘똘 뭉쳐있고 교사는 그저 총부리를 뒤에 겨눈 사람이라도 있는 듯 아주 철저하게 줄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는 그런 모습이다. 줄을 세우는 자와 줄을 세워지는 자 사이에는 신뢰가 생길 리가 만무하다.
공평하게 줄세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평가의 타당성보다는 객관성만을 앞세우는 현실이 안타깝다. 평가의 타당성을 보장받으려면 교사의 전문성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학부모도 학생도 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사되기가 점점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웬만한 전문적 지식과 능력이 없이 교사가 되기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경쟁을 뚫고 교사가 되는 순간 그의 전문성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그 누구도 교사가 가진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새내기 교사는 그런 현타를 맞이하여 깊은 회의감에 빠지기 일쑤이다. 누구도 교사를 전문가로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학부모의 어이없는 민원을 없애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야 할 뿐이다.
❚모두가 지친 무한 경쟁사회를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불신의 뒤에는 무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증이 자리 잡고 있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순간 생존마저도 위협받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학부모, 학생, 그리고 교사 모두는 그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나친 대학 입시 경쟁과 소수의 작은 일자리 차지를 위한 무한 경쟁을 놓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한 화상 인터뷰에서 거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비뽑기 선발’이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멋진 제안을 한 바 있다.
‘능력’ 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그 능력 한 가지를 기르기 위해 인간성마저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선발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아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무능력함에 빠져 버린다. 하지만 샌델 교수는 지적한다. 세상에는 ‘운’이라는 요소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발 된 자도 ‘운’이 좋아 선발된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해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선발 되지 못한 자도 자신의 무능력함만을 전적으로 탓할 게 아니라 운이 없었음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샌델 교수는 치열한 대입 경쟁의 대안으로 지원자가 일정 자격이나 자질을 갖춘 사람에 대해서는 ‘운’이라는 요소로 사람을 선발해아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능력’ 한 가지 잣대로 한다면 그 경쟁은 무한대로 치솟게 될 것이고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세상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외에도 운이 따라준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공짜로 부여받은 그 운이라는 부분에 대해 감사해하며 운을 부여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린 그래서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나?
내가 목격한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자신의 능력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신의 은혜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샌델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부여 받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하되 그 이후의 것은 신의 의지라 굳게 믿는다. 혹여 최선을 다한 결과 실패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에 대한 자책을 하기보다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성공을 얻었다 하더라도 절대 오만함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만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도 성공도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간다.
아이에게 지나친 경쟁의 구렁에 내몰며 모든 책임을 아이의 무능력함 때문이라고 몰아가지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부모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이라 자책하지도 말아야겠다. 세상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우리 인간의 한계치를 인식하고 그 한계범위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도록 교육해야한다. 그 한계치가 없는 듯이 우리아이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능력과 운 둘 다 존재함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교육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들은 이틀 후면 기말고사를 친다. 이틀 전인 내일 아들은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3대 3 농구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 대회에 나가기 위해 오늘 미리 시험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그 아이를 농구대회에 불참시키면서까지 하루 종일 공부를 시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아이의 행복을 모조리 희생시키면서 좋은 시험 성적 하나를 위해 아이를 몰아 부치는 것은 순리에 역행하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시험 성적 하나로 줄 세우는 그 현실에 덜 적극적이려한다. 대신, 아들이 어른이 되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운이 허락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