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심심해
우리가 머문 곳은 미국 남부였다. 그곳의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의 불볕더위와 비슷하다. 한 낮 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덥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이면 그나마 조금의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유독 심심했다. 이모네들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우리끼리 살아 보는 게 평생 처음이라 우리 두 아이들은 미국 생활 첫 여름 방학을 무척 지루해 했었다. TV나 영화에서 보이는 미국 아이들의 모습은 늘 즐거워 보이고 매일 파티를 할 것 같았는데, 우리의 여름 방학은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고 단조로웠다. 기대가 컸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놀이라는 것이 혼자선 하기 힘든 것이기에 친한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휴가철이나 방학 같은 기간은 오히려 더 심심해 진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외사촌들이랑 늘 붙어살아서 그런 지 유독 우리 네 명끼리 뭐를 하자고 하면 그게 뭔지도 안 물어 보고 그냥 “싫어, 우리끼리면 싫어”가 입에 붙었었다. 미국에 와서는 이제 홀로 서기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나조차도 마음이 뻥 뚫린 것 마냥 허전함을 이기기가 힘이 들었다.
❚우리 네 가족의 레져 생활
미국유학을 결심하기 일 년 전 즘부터 나와 두 아이는 방과 후에 테니스를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미국에서 아이들은 테니스를 주로 치면서 어울린다고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테니스를 꼭 배워서 가야한다고 주장했었다. 대학시절 캐나다 배낭여행으로 일 년을 다녀온 외국 살이 선배인 남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었다. 미국 가기 전 1년간 학교가 끝나자마자 두 아이와 테니스를 배우러 다녔었다. 딱히 잘 치는 실력은 아니지만 그저 남편이 테니스 치러 가자고 하면 싫지 않을 정도의 마음은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배워둔 테니스 덕분에 긴 여름 방학동안 우리 네 명은 미국에서 머물던 주택 단지 내 테니스장에 매일 해질녘이면 출근하다시피 하며 우리만의 레져 생활을 즐겼다.
테니스장 바로 옆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안전요원이 늘 지키고 있고 물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 이제 막 미국 생활을 시작한 우리에겐 야외 공짜 테니스 코트와 야외 수영장은 천국을 연상케 할 만큼 멋졌다. 테니스를 치고 바로 옆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좋은 수영장에 현지 미국인들은 거의 안 보인다는 거였다. 어떤 저녁엔 우리 네 명 뿐 일 때도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가 챘을 만도 한데, 그때까지도 몰랐다. 미국 아이들은 그런 수영장에서 많이 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살던 그 주택 단지에는 미국 백인 가정이 상당히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영장을 찾는 아이들은 미국 백인 가정의 아이들보다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그들만의 레져 생활
미국 아이들은 어디서 놀까? 난 참 궁금했다. 그 아이들은 대체로 가족 단위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물놀이는 부모님의 레이크 하우스 (호숫가 세컨 하우스)같은 데서 즐기는 것 같았다. 우리가 미국에서 머문 지 세 번째 여름이 되던 해 둘째인 아들도 미국교회 소속 학교에 제법 적응을 한 즘이었다. 어느 날 아들 친구 엄마가 우리를 그 레이크 하우스 파티에 초대를 해주었다. 정말 환상이었다. 아들 친구의 외할아버지 집인데 잠시 빌렸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아이들을 그 집 앞 호숫가에서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하게하며 물놀이를 하게 했다.
알다시피 이런 초대는 아이들 끼리나 가족들 끼리나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하지 않는다. 미국은 워낙 다양한 인종과 출신배경의 사람이 사는 나라이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새로운 사람에 대한 “선긋기”를 한다. 적어도 내가 머물던 미국 남부는 그랬다. 전통적으로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라 인종이 다름에 대한 불편함도 오랫동안 사회전반에 퍼져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예 학교도 백인이 주로 다니는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낸다. 비싼 등록금은 그 자체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게 만든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그 학교도 비록 교회 소속 사립학교이긴 하지만 역시나 흑인이 손에 꼽힐 정도 뿐 이었다. 그런 기성세대의 문화는 당연히 커나가는 아이들 눈에도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그 뿌리째 뽑아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호기심
흑인에 대한 관습적인 거부감을 가진 백인들이라 하더라도 유독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명석함과 예의바른 것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우리 아이들이 처음으로 다니던 공립학교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쉽게 느껴졌다.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는 태권도 학원이 몇 군데 있었다. 백인 가정의 아이들도 태권도학원에 제법 꾸준히 다니 것을 봤다. 그들의 부모들은 태권도와 같은 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의 예의바른 태도를 그들의 자녀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작 한국인인 우리 아들은 타국에서 만난 낯익은 스포츠였지만 태권도 배우는 건 강력히 거부했다. 대신 미국아이들이 즐기는 농구나 미식축구에 관심을 보였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배움이 자연스레 상대 문화에 대한 이해심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방과 후 번개 모임
수업이 끝나고 친구 집에 놀러 오가는 일은 대체로 같은 인종끼리 이루어 졌다. 한국인 엄마인 내 친구 영주씨네는 아무 때나 번개를 하면 쉽게 그 집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만나 놀 수 있었다. 비록 나의 영어 수준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수준이 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인 엄마와 아이를 우리 집에 초대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일 번개는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미국가정은 자녀가 평균 3명이었다. 그러니 방과 후 또 다른 집 아이들을 불러서 놀게 하는 건 힘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이외에 나중에 알게 된 외지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미국 현지인 엄마와 아무 때나 번개 칠 그런 관계까지 형성하는 건 5년이 있어도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그런 번개 모임이 가능한 가정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미국 교회 학교에서 나와 제일 친하게 지냈던 브라질 친구 루시 와 러시아 친구 에나였다. 루시는 정이 많고 사교적이었고 그 집 아이들도 그랬다. 애나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정이 아주 깊은 친구였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그렇게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 그렇게 우리는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더 친하게 지냈다.
❚첫 여름 방학 스케줄
대부분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미국 남부의 특성상 휴일에 학교 친구에게 놀자고 하는 게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기나긴 두 달 반의 여름 방학 동안 친인척도 없이 어떻게 보낼까 대략 난감했다.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라 참 당황스러웠다. 나는 어쨌든 계획이라는 걸 세워봤다. 인근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 종합 학원이 있었다. 미국에도 우리나라에서 하던 대로 국/영/수 학원, 피아노 학원을 뺑뺑이 돌리는 한국인 부모님도 계셨다. 그러면 하루해는 잘 넘어 가겠지만 난 미국씩이나 가서 구지 한국인이 하는 학원에 등록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현지 미국인 레슨 듣기
- 미국 대학교 주관 어학원 등록
여름 방학 두 달 반을 왕창 놀릴 수 없었다. 이제 시작한 미국 생활이라 영어 공부를 무엇보다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첫 여름 방학동안 인근 대학교 어학원에서 하는 방학 특강에 첫째와 둘째 모두 등록시켰다. 이곳에는 비단 ESL 수업 말고도 과학이나 독서 수업 같은 것이 있어 현지 미국 아이들도 많이 다녔다. 첫째는 ESL수업을 등록했다. 둘째는 첫 학기 간 미친 영어 책 읽기덕분에 어느 정도 학년수준과 비슷한 영어 실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현지인들과 같이 수업하는 독서 수업을 등록했다. 두 아이모두 싫다는 내색 없이 즐겁게 그 프로그램을 잘 다녀주었다.
- 집 앞 야외 풀장 미국 학생 수영 레슨
한국에서 우리 아이들은 수영 학원을 제대로 다닌 적이 없었다. 이곳 더운 남부에서 물놀이는 필수였고 아들은 물에 대한 공포심도 많은 편이었다. 물에 대한 공포심도 극복하고 삶의 생존 스킬 중 수영은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단지 내 하우스 관리소에서 그런 수영 과외 주선도 한다고 했다. 대부분 같은 하우스 단지 내에 주거하는 대학생의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이긴 하지만 멀리 수영 학원에 보내는 것 보다 훨씬 심플하고 집 근처라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오전 어학원 수업이 끝내고 오후에는 집 앞 풀장에서 수영 레슨을 받도록 했다. 딸은 미국 백인 여대생한테서 아들은 미국 백인 고등학생한테 각각 수영을 배웠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레슨이라 여러모로 안심도 되고 좋았다.
- 미국인 피아노 과외 레슨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딸은 미국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 과외도 받았다. 30분 정도 레슨 하는 데 30불 이었던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한국의 피아노 학원비랑 비슷했다. 기왕하는 피아노 레슨이면 집 앞 한국인이 하는 학원보다 미국 현지인한테 배우는 경험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미국 공립학교 학기 초 Open House(학기 초 학부모 설명회 및 새 학기 학용품 제출하는 날)에서 우리 딸과 같은 반인 아이의 엄마를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나이에 학교 교사 출신이라 대화가 잘 통했다. 남편은 목사님이고 본인은 성가대에 음악 담당이라며 소울이 살아 있어 보이는 흑인 엄마였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 친구에게 우리 딸 피아노 레슨을 부탁했다. 아들은 한 달 하다 포기했고 딸은 거의 1년간 레슨을 이어서 받았다. 늘 레슨이 끝나고 나에게 설명을 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피아노는 나의 영역이 아니지만, 늘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느낌을 살려서 하도록 하는 연습을 강조하셨다. 역시 소울이 살아 있는 분이셨다.
- 유소년 축구팀 가입 과 YMCA 농구 수업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은 한국인 코치가 하는 여름 방학 축구 수업을 신청했다. 더운 여름이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번 씩 그 축구팀은 옆 도시에 원정 경기를 가기도 했다. 그러면 그 하루는 온전히 축구에 다 쓰인다. 한국인 코치가 하는 축구팀 연습이외에도 미국 현지 아이들과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찾다가 인근 YMCA에서 운영하는 농구 레슨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들을 제외하면 그곳은 거의 100% 흑인 아이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들은 화려한 농구 플레이를 펼치는 흑인 아이들 틈에서 혼자서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는 아시아인이었다. 미국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학기 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유일한 외국인이라 아들은 그런 공간에 가는 게 정말 싫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땡볕에도 혼자 한 두 시간은 기본으로 농구 연습을 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해 여름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된 농구 레슨을 죽어라 싫어했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가족들까지 와서 그 체육관 안에서 작은 리그를 펼치는데 웬만한 NBA 농구 경기만큼이나 가족들은 열띤 응원을 했다. 그 틈에 유일한 한국인이며 농구 완전 초자인 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살짝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든지 말든지 현지화를 최대한 빨리 시켜야겠다는 마음에 그 첫 여름 방학은 거의 결석 없이 농구 연습을 다녔다.
- 미국교회 VBS (Vacation Bible School 여름 성경학교)
아무리 미국에 와있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교류할 일은 별로 없다. 한국인들은 주로 같은 동네에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 친구와 늘 시간을 보내다보면 미국에 와 있는 지 한국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현지 미국인들과 교류하기란 참 쉽지 않다.
다행히 미국 교회는 해마다 여름 방학에 특히 6월에 여름 성경학교를 일주일간 한다. 너무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별 달리 신앙에 큰 관심이 없었던 상태였지만, 나는 오직 우리 아이들이 현지 아이들과 문화 교류를 할 절호의 기회라 여겨 그걸 신청했다. 첫 2년간은 우리가 다니던 교회 여름 성경학교만 등록했었는데, 차츰 적응이 된 그 다음 해에는 다른 미국 교회 성경학교도 신청한 기억이 난다. 미국 남부는 아직 크리스찬이 많은 동네였다. 낯선 사람들에게 다소 배타적인 문화가 있지만 그런 교회 행사에서 만큼은 아주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동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많은 미국 아이들이 그곳에 우르르 몰려 있다.
❚드디어 여름 방학 끝
그렇게 우리의 첫 기나긴 여름 방학은 끝이 났다. 미국에서의 여름 방학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지루했다. 하지만 현지 적응을 해나가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많이 분주했다. 아이들의 현지 적응을 잘 시키고자 하는 나의 마음 역시 크고 작은 고민과 염려로 업치락뒤치락 했던 여름이었다.